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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선열들의 숨소리를 듣는다-16 보은 이중화

독립자금 구하러 동북아 뛰어다닌 숨은 공로자
러시아 군인 통역 활동 중
임시정부 요원과 교류 시작
군자금 모아 임정으로 송금

  • 웹출고시간2019.08.01 17:58:37
  • 최종수정2019.08.01 19:54:26
[충북일보 강준식기자] 독립에 가장 필요했던 '돈'. 독립자금을 구하기 위해 동북아시아를 뛰어다닌 독립운동가가 있다. 보은 출신 이중화(李重華·1880~?) 선생이다.

1880년 보은에서 태어난 이중화 선생은 3·1운동이 펼쳐지던 1919년 7월께부터 러시아 유격대장 메리코포스코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이 선생이 간도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 이동휘(李東輝)와 연락을 취하는 등 임시정부와 교류하던 것도 이때부터다.

이듬해인 1920년 12월 24일 중국 안동현(安東縣)에서 임시정부 요원 김판이(金判伊)를 만나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로 협의했다.

경성부(京城府)에 잠입한 이 선생은 1921년 5월 중순께까지 모의 폭탄을 제조하기도 했다.

또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증서 1천 원권·500원권·100원권 등 모두 7천600원 상당의 증서와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명의의 수령서 10매를 지닌 뒤 경남 밀양으로 향했다.

이 선생은 밀양에서 박수엽(朴秀燁)·박병목(朴炳穆)에게 각 2회, 이병규(李炳圭)·안종엽(安鍾燁)에게 각 1회, 손진원(孫振遠)에게 3회에 걸쳐 군자금을 모집했다.

모두 3천여 원의 군자금을 모집한 이 선생은 음력 7월께 김판이에게 전달해 임시정부로 송금하도록 했다.

이후 이 선생은 대구와 밀양을 오가며 김판이의 귀환을 기다리던 중 1921년 10월 21일 대구 대화정(大和町)에서 대구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됐다.

1922년 2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강도·폭발물벌칙 위반 등으로 징역 8년을 받고 공소했으나 같은 해 3월 3일 공소 취하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지난 2013년 이중화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충북남부보훈지청은 '8월 우리고장 독립운동가'로 이중화 선생을 선정했다.

지청은 이와 함께 보은군 내북면 봉황리의 '이승칠 지사 공적비'를 이달의 우리고장 현충시설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승칠 지사는 1910년 사헌부 감찰직 재직 중 경술국치를 당하자 자결 순국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12년 사망한 일왕의 상복착용 강요에 이를 거부, 같은 해 6월 26일 '몸이 원수의 상복을 입는다면 이는 만대의 수치다. 머리가 떨어지더라도 오랑캐는 되 수 없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보은군 내북면 봉황대에서 투신 순국했다. 내북애향동지회가 건립한 공적비는 2010년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 강준식기자 good120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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