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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뜨거웠던 丹心' 단재 신채호 선생

유년 시절 보낸 낭성면 귀래리에 묘역·기념관
21일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83주기 추모식

  • 웹출고시간2019.02.20 20:34:20
  • 최종수정2019.02.20 17:47:44

선생이 피체됐을 당시 모습.

ⓒ 국가보훈처
[충북일보]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자 독립운동가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 순국 83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단재 선생은 민족사학자이며, 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로서 우리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1880년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의 진외가(外家)에서 출생한 선생의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그의 아이 때의 이름은 '채호(寀浩)'였는데 나중에 '채호(采浩)'로 개명했다.

8세가 되던 1887년 부친상을 당한 선생은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로 이사했다.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이곳에는 선생을 기리는 묘역과 기념관이 조성돼 있다.

할아버지가 차린 사숙에서 한학 교육을 받았던 선생은 10대 때 이미 사서삼경을 독파해 신동이라고 불렸다. 19세가 되던 해에는 성균관에 입학했다. 이후 백암 박은식 선생에게서 진보적인 유학경향을 접하게 된다. 유교문학의 한계를 깨달은 선생은 봉건유생의 틀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갖게 된다.

단재 신채호 선생.

ⓒ 한국학중앙연구원
1905년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됐으나 관직에 관심이 없던 선생은 위암 장지연 선생의 초빙으로 '황성신문'에 논설기자로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언론활동을 시작했다. 1906년에는 영국인 베델 선생이 사주로 있는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진이 됐고, 일제의 침략 정책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자유롭게 비판했다. 논설기자로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은 주필이 됐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일본의 삼대충노', '서호문답', '영웅과 세계' 등 애국적 계몽논설과 사론을 집필하고 '이순신전', '최도통전' 등 역사물을 연재했다. 글을 통해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셈이다.

선생은 언론활동뿐 아니라 여러 활동에도 직접 참여했다. 1907년 안창호 선생이 만든 신민회 창립위원으로 참가했으며,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족경제수호운동인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했다.

선생이 애국계몽사상가로서 보다 확고한 위치를 다지게 된 것은 민족역사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다. 선생은 민족사적 영웅들의 전기를 통해 국가 위기의 상황에서 제2의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을 고대하는 민족자존의 방도를 강구했다.

신채호 선생 친필.

ⓒ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생은 국권회복에서 가장 중요한 원동력인 국민의 애국심을 일으키기 위해 새로운 민족주의적 역사를 저술했다. 이때 만들어진 게 '독사신론'이다. 한민족을 주인공으로 역사를 체계화한 것으로, 일제의 식민주의 역사관을 거부하고 자주적이며 실증적인 한국고대사를 재구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10년, 더 이상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신채호 선생은 안창호, 이갑, 이종호 선생 등과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는 중국 산동반도의 청도에서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김학만 선생 등이 설립한 권업회의 기관지, '권업신문'이 창간되자 이 신문의 주필로 취임해 활동했다.

국외의 망명지도자들이 대동단결선언과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모색할 때 선생 역시 두 선언서에 서명했다. 이후 상해로 가서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의 모임에 참가하기도 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 사당.

ⓒ 청주시
선생은 그 후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밝히는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이 선언은 국내외 동포들에게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독립사상을 한층 드높이는 계기가 됐다.

평생 독립을 위해 힘쓰던 선생은 1928년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다가 국제 위폐 사건에 연루되면서 체포됐고, 뤼순(旅順)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옥사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 묘소.

ⓒ 충북도
2월 21일은 단재 선생의 순국일이다. (사)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는 이날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83주기 추모식'을 개최한다. 추모식은 개회선언과 국민의례, 선생 약력보고, 헌사, 추모사, 헌화 등으로 진행된다.

'얼굴에 물을 찍어 바르는 방법으로 꼿꼿이 서서 세수를 했다'는 단재 선생의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일본 식민지배시대를 살아야 했던 치욕을 견디는 나름의 방법이었다.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언론 활동과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고 바로 세우는 활동을 통해 조국 독립을 염원했던 단재 선생이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심어둔 불씨는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다.

/ 유소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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