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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에세이스트

선유, 이름만으로도 안개 같은 섬이었다. 신선이 노닐던 곳이라고 했다. 이곳엔 갯바람조차도 선하게 흘렀다. 밀물이 들어찬 얕은 바다엔 아주 자그마한 고깃배가 장난감처럼 떠다녔다.

섬의 백사장을 거닐 때면 가슴이 따뜻해졌다. 머릿속은 환해졌고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호젓한 해안을 거닐다 보면 용서 못할 자신조차 바다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제 남루한 내 욕망쯤이야 다 털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천형의 시간들도 이곳에선 다 비껴가고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이 섬에서는 내 외로움조차 우아하고 당당했다.

릴케의 말 한 마디가 가슴에 탁 박혔다. "가장 중요하고 진지한 것에서 인간은 이름 없는 혼자다"

이 섬에 나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수록 내 이름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도 만족스러웠고, 이름이 불리지 않아도 난 외롭지 않게 되었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구름사이로 카랑카랑한 햇살이 설핏 비출 때 난 행복하다고 느꼈다.

구름 사이로 잠시 드러나는 햇빛처럼 행복이라는 것도 한 순간의 느낌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행복은 무덤덤하게 스쳐가는 하루하루 사이에 아주 잠시만 나타나는 짧은 순간의 반짝임, 눈부심, 따뜻함, 설렘일 것이다. 그 잠깐의 순간을 더 많이 가져야겠다고 난 다짐했다.

다리가 저리도록 섬을 거닐다 보면 마음이 다 비었다. 그러면 육지에 두고 온 내 삶과 내 인생길의 도반들이 다시금 그리워졌다. 허름했으나 소중한 것들, 무덤덤했으나 간절한 것들이 갯바람 속에서 슬며시 내게 다가왔다.

이 때쯤이면 정갈해진 마음을 간직한 채 난 육지로 되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배를 따라 갈매기 떼가 날아들었다. 갈매기들의 눈빛이 향하는 푸른 바다를 나도 함께 바라보았다.

나는 먼 바다를 갈망하는 갈매기들처럼 떠나온 육지에서의 내 항해를 생각했다. 난 내 삶을 더 살뜰히 보듬으며, 더 자유롭게 비상하리라 마음을 다지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러던 섬이 아니었다.

고군산의 4개의 섬이 다리로 연결되었다. 400여 미터를 가로지르는 고군산대교는 외팔의 현수탑을 높이 쳐든 채 우뚝 서 있었다. 그 주탑은 돛을 형상하였으나 배는 아니었다. 배 대신에 다리위로 쉴 새 없이 자동차들이 오갔다.

섬 곳곳에 자전거만 다닐 수 있던 작은 길은 버스가 드나들 수 있는 도로를 만들기 위해 헤집어놓았다. 섬은 개발 계획에 따라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처럼 자본의 진열장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철근 콘크리트 건물들이 세워지는 공사 현장엔 비계목이 건물들을 감싸고 있었다.

더 생소한 풍경은 사람과 자동차의 대열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 행렬은 조용한 산책을 더 이상 바랄 수 없게 했다.

이곳은 머지않아 사색을 하는 섬이 아니라 유흥을 위한 도시가 되어 있을 거였다. 도시의 아케이드 상점이나 백화점처럼 허영이 넘치는 곳, 세련되었으나 욕망이 넘실되는 곳, 섬이 아닌 또 다른 육지의 모습 그대로 변해있을 것이다.

난 버스에 몸을 싣고 큰 다리를 건너 문명을 닮아가는 섬을 떠나왔다. 잠시 동안 착잡했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한때는 풋풋하고 애틋했던 첫사랑도 언젠가는 잊혀지고, 가장 믿었던 친구에게도 배신당하는 게 인생이다.

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어 그 섬에 가고 싶다'던 어느 순박한 시인의 시를 입안에서 읊조렸다.

사람들 사이의 섬에 다리가 놓여 아무 거리낌 없이 드나들 수 있다면, 그 순박한 시인이 언제든 그 섬에 가고 싶어 할지, 아니면 그 섬을 떠나고 싶어 할지 몹시도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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