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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에세이스트

무감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먹고 사는데 온 기력을 소진한 내 몸이 잠시 주춤거렸다. 비로소 우주의 순환과 세상의 생로병사를 구현해 낸 자연이 더 또렷이 보였다. 잎을 떨군 나무들도 이제는 간결한 익명자로 홀로 섰다.

3년쯤 되었나 보다. 만사가 시틋해졌다. 세상의 기준에 나를 맞추려 안간힘 쓰던 내 욕망이 거세된 듯 했다. 아무것도 흥미가 없었다. 일간지의 작은 지면에 10년 가까이 내던 칼럼을 그만 쓰겠다고 통보했다. 책읽기도, 쓰기도 다 무의미해 보였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뭘 해야 할지 잠시 길을 잃은 것처럼 나를,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 기간 동안 밀물처럼 다가온 몇몇의 죽음이 있었다. 내 20대부터 정신의 의지였던 손위 처남이 회갑을 치른 후 돌아가셨다. 그 충격의 여파인지 장모도 얼마 안지나 소천 하셨다. 사반세기 동안 동고동락한 회사 선배를 암으로 잃었고, 한 사무실에서 몇 년간 함께 껄껄거리며 부대끼던 동료는 심장마비로 허망하게 세상을 등졌다.

한 때는 마주보며 웃고, 담소와 밥을 나누고, 사람살이의 버거움에 서로 어깨를 도닥거려주던 이들이었다. 아직 결혼도 시키지 못한 장성한 아들을 두고 세상과 작별한 처남, 여태 배필도 못 만난 예쁜 두 딸을 남겨둔 채 내 동료는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모든 생명 있는 것들, 특히 한 개인의 삶이 절대적 미완으로 남겨진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체득한 순간이었다.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우리네 삶은 얼마나 통속적이던가. 아등바등 사는 삶이 참 부질없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유골함을 땅에 묻으며,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는 그들의 따뜻함을 언제까지나 잊지 않으려 했다. 한줌 가루로 들려주는 그들의 아쉬운 목소리, 버둥거리던 오욕칠정의 흔적들,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인생의 해답들을 그리움으로 간직하려 했다.

그즈음 법정과 성철스님의 법문을 구해다가 참 열심히도 읽기 시작했다. 삶 그 자체가 되면 행복과 불행의 분별이 사라지고, 번뇌와 보리가 별개가 아니라는 말씀, 우리에게 닥친 고통은 내가 불러들인 삶의 매듭이라는 것, 강과 산은 본래 주인이 따로 없어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주인이 된다는 말, 그 중에서 나를 수액처럼 빨아들인 것은,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모든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이라는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단어였다.

난 그 한마디로 그 이후의 시간들을 버텨내었다. 이 가을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일기일회, 생애 단 한번뿐인 가을이며, 내가 마주치는 너 또한 단 한 번의 인연이었다.

몇 달간 이름도 잘 모르고 지내던 인턴직원이 작별선물이라며 코팅한 작은 책갈피를 내게 건넸다. 2년 전 신년 사보특집으로 낸 내 기고문에서 하나의 문장과 프로필 사진을 발췌해서 직접 만든 것이었다. "사람이 위대한 점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다리라는 것이다"라는 니체의 말, 까마득히 잊고 있던 그 문구하나가 나를 깨어나게 했다.

미완인 채로 남겨지는 삶이 인간의 숙명인 것을, 미움과 처연함과 아쉬움으로 잊히는 신기루의 생애일지라도 우리가 다리이기 때문에 살만한 것임을 그 글귀 하나가 나를 일깨운 것이다.

누구와의 만남도 사소하지 않았다. 비록 밥 한 끼 다정하게 사주지 못한 인턴직원도 내겐 각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구체적인 손짓 하나로 한순간에 뚜렷한 자국을 남긴 그 청년을 난 잊지 못할 것이다.

서로에게 관통하는 시간이 있다. 부연설명이 필요 없는 시간이 흐를 때가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익명으로 사라지지 않는 시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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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