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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5.05.05 13:38:15
  • 최종수정2015.05.05 13:37:03

장정환

에세이스트

모든 근시는 인상파 화가와 같다. 근시인 난 가끔 안경을 벗고 도시의 야경을 바라본다. 일순 빛으로 가득 번지는 세계, 바로 모네의 눈을 갖게 된다.

모네의 그림을 볼 때마다, '생 라자르 역'에 짙은 안개처럼 눅진하게 깔리는 증기기관차의 수증기, 금방이라도 끈적이는 수증기 입자가 내 온몸을 뒤덮을 것만 같다. 길고 묵직한 기적소리가 그리워진다.

영화적 아름다움으로 생동하는 '호수'의 풍경은 언제나 뽀송뽀송하게 촉각을 자극하는 행복을 준다. 주말 오후 호반 카페에 모인 군상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목젖을 적시는 차가운 맥주 거품, 수면에 어리는 햇빛과 하늘, 출렁이는 물결의 음영이 가뭇하다.

빛은 물이나 시간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며 유장했다. 빛은 생명의 반짝임과 치유의 힘으로 내 마음속 세계와 아득한 자연을 품 넓게 아우르며 흘렀다.

빛의 색채와 형태가 나뉘지 않은 세계, 세계를 자신의 감성으로 인식하여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표현한다는 인상파의 화법은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의 기법이었으리라.

안경을 바꿨다. 얼마 전부터 책을 읽을 때마다 글자가 퍼져서 어른거렸다. 어긋난 초점이 날 쉬 피로하고 답답하게 만들었다.

지독한 근시에다가 난시, 노안까지 겹친 눈은 말년 모네의 '수련'처럼 나른한 시야만 제공했다. 빛을 명료한 형태로 인식하지 못하고 빛 자체만 추구했던 인상파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칼날처럼 날카롭고 쨍한 초점을 되찾고 싶었다.

그동안 내 근시의 망막 속으로 들어온 것과 밖으로 밀려난 것들을 헤아려 보았다. 찰나의 인상만으로 그린다는 모네처럼 내 느낌과 주관만 믿고 가볍게 뭉개 버린 형태들이 내 생애 내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내 가난을 핑계로 가장 친한 친구의 결혼식 장면을 놓쳤고, 알량한 밥벌이를 한다는 이유로 부모님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바깥세상의 재미를 찾느라 아이들의 별빛 같은 눈빛과 아내의 화사한 웃음을 많이도 잃었다. 마지막 생명을 부여잡은 자의 간절한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

실직하고 파산한 친구의 외로운 얼굴을 찾지 않았고, 배고프고 절망한 사람의 고개 숙인 모습을 외면했다. 아! 나는 왜 나의 빛만 바라봤던가.

가방에 처박아 두었던 카메라를 꺼내어 줌렌즈를 교체했다. 50mm 표준렌즈 하나면 족할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손쉽게 광각과 망원으로 보고 싶은 것만 확대했고, 프레임 안에서 빼고 싶은 장면은 성급하게 지웠다. 나만의 빛의 상징을 찾았고, 메타포를 구했고, 이데아의 의미만 담으려 했다.

카메라의 어원이 '어두운 방'이듯이, 빛이 만드는 것들은 그 어두운 몸에서 탄생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그것은 내가 움직여서 전체를 포착하는 것이며 배경과 그림자까지 함께 보는 것이다. 편견과 편협, 치우침을 이겨낸 균형이며, 사실과 추상의 친밀한 조화이다.

몇 년 만에 교체한 새 안경이 마음에 든다. 시력에 맞춰서 마련한 돋보기는 더욱 흡족하다. 이제 초점이 또렷한 풍경, 윤곽이 확실한 사람들의 모습이 기다려진다.

어느 누가 말했던가. "명백히 밝혀진 사실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없다." 새벽녘, 연둣빛 풀잎마다 봄비 방울이 촘촘히 반짝인다. 사람이 그리워졌다.

오늘은 초점이 아주 잘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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