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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에세이스트

돌연 가을이다. 가을이 느닷없이 왔다. 내게 가을은 바람으로, 우연으로 왔다.

지난여름엔 감당하기 힘든 폭우가 수시로 왔다. 비가 지나가면 쨍한 하늘이 농담처럼 드러나곤 했다.

가을로 변신하기 위해 그렇게도 많은 비가 필요했다. 한 번씩 비가 내릴 때마다 영원할 것 같던 여름이 조금씩 지워졌다. 지난 계절에 미처 내뱉지 못한 말, 가슴을 치는 아쉬움, 주체 못할 간절함, 억누르지 못한 뜨거움도 함께 지워졌다.

여름과 가을이 교집합으로 겹치는 지점에서 난 비로소 시간의 질감을 실감했다. 계절 사이를 관통하는 시간은 왜 이리도 가볍고 단순하고 투명한지, 비발디의 가을을 음미하듯 난 계절의 간주곡, 두 계절을 통과하는 여린 바람 속에 온몸을 맡겼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난 서재의 책과 노트들을 정리했다. 그건 한 계절을 마감하고 다른 계절을 맞이하기 위해 매번 반복하는 통과의례였다. 버려야 할 것과 간직해야할 것을 구분하는 절차, 망각해야 할 것과 기억해야할 추억을 갈무리하는 일이었다.

시간을 구획하고 매 순간에 의미부여하고 정의하는 작업, 하지만 이제 그 일을 하지 않는다.

단념하는 법을 알아 버린 것일까· 사람살이를 달관해 버린 것일까· 아니면 진짜 나이를 먹어버린 것일까·

지난시절 내내 많은 맹세들이 있었다. 지키지 못한 맹세도 많았다. 꼭 지켜 내야할 맹세도 있었다. 기억하지 못한 무책임한 맹세도 더러 있었다. 난 이제 더는 맹세하지 않는다.

그러 연유로 난 나이를 먹었다. 늙음은 더 이상 맹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삶에 있어 모든 맹세는 배반하고 속기 위해 존재하는 법, 인생의 필연을 지키기 위한 맹세가 얼마나 공허한지를 알 때쯤이면 늙은 것이다.

난 너무나 오랫동안 내 삶의 우연을 필연의 의미로 여겼다. 사는 동안 필연성의 씨줄과 날줄로 직조하느라 매번 진지한 맹세를 했다.

그해 가을, 지하 음악다실에서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 곳에서 비지스의 '할러데이'를 듣지 않았다면, 낙엽 떨어지는 캠퍼스 하교 길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그 때 단과대학 축제를 스쳐갔다면, 그 우연한 눈빛을 나누지 않았다면, 그 우연한 몸짓을 외면했다면, 그 우연한 말을 섞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맹세가 없었다면 내 삶은 다른 무늬와 결로 엮어졌을 것이다.

내 인생은 매 순간마다 얼마나 많은 우연한 만남, 우연한 문장, 우연한 음악 한 소절, 우연한 말 한마디, 우연한 스침으로 만들어졌던가.

이번 가을은 우연한 만남처럼 낯설게 맞았다. 그 우연한 마주침이 필연성의 지점을 찾던 나를 바람처럼 가볍게 했다. 삶은 우연이 상수이고 필연이 변수였다.

그해 가을, 지하 음악다실에서 비지스의 '할러데이'를 함께 듣던 그녀는 내 곁에서 나이 들어간다. 한순간의 우연한 만남이 내 두 아들과 두 며느리, 내 손주의 인생도 만들었다.

결국 하찮고 무의미한 우연들이 내 삶을 이끌었다. 그러니 더 이상 진지하지 말일이다. 필연도 구하지 말고, 벅찬 맹세도 하지 말일이다. 더는 플라톤식의 이데아나, 신성이나, 불멸의 원형 따위를 무겁게 구하지 말일이다.

우리가 보낸 시간은 이 가을의 바람만큼이나 가벼웠다. 우리가 보낼 순간도 우연한 스침보다 사소하고, 쉬 잊힐 농담보다 홀가분할 것이다. 이 가을을 설레는 'Holiday'로 맞아야 할 이유가 파란하늘보다 더 또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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