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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에세이스트

[충북일보] 여름이 사위어간다. 새벽에 문밖을 나서니 바람의 질감이 달라졌다. 이제 뜨거움은 없다. 나는 아무런 채비도 하지 못한 채 여름을 지나쳐 버렸다.

길모퉁이의 모감주나무를 좋아했다. 여름내 항아리 모양의 단아한 자태를 탐했고, 산책길엔 모감주나무의 노란 꽃을 보려고 일부러 발걸음을 돌리기도 했다. 열매 품은 꽈리는 앙증맞았다. 햇살 내리쬐는 노란색 나무꽃 아래 서면 내 그림자도 노랗게 물들었다. 난 시골집에 모감주나무 한 그루 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변하니 까만 열매를 감싸 안은 꽈리는 이제 진갈색이다. 푸른 잎 사이로 점점이 매달려 싯누렇게 들뜬 꽈리들, 한때는 꽃이 피면 '골든레인 트리'라는 이름대로 황금색 비가 내리듯 찬란했다. 연둣빛 말간 풋열매 껍질은 모감주나무 정령이 달아놓은 초롱 같았다. 그렇게나 열광하던 그 모습이 흉하게 바뀌었다. 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난 모감주나무의 서늘한 그늘을 지나치면서 햇살 닮은 여름날의 노란 꽃을 추억한다. 여름을 더듬듯이 빛바랜 내 젊은 날의 풍경을 되살린다. 나도 한때는 모감주나무 같았을까· 잎새에 반짝이던 눈 부신 햇살처럼 빛났을까? 그 노란 꽃에 스치는 바람처럼 싱그러웠던가? 짙은 잎사귀처럼 마냥 푸르렀을까?

한 그루의 나무가 자기를 성장시킨 물과 바람과 햇빛을 담고 있듯이 사람의 몸속에도 그가 살아온 우여곡절의 흔적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으리라. 나무의 나이테가 자연의 '결'대로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사람의 일생은 그 사람의 얼굴로 고스란히 나타날 것이다.

난 나무처럼 나의 나이를 몸속에 담고 있음을 느낀다. 얼굴은 물기가 빠져 푸석거리고,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살갗은 얇아지고 주름졌다. 키도 더 작아졌다. 모감주나무의 누렇게 들뜬 꽈리처럼 내 얼굴은 검은 반점들이 늘어만 간다. 결대로 살지 못해 생긴 나무의 옹이처럼 내가 살아가면서 입은 상처들은 흉터로 남았다. 하지만 옹이가 나무를 더 강하게 만들었듯이, 상처는 내 삶의 내성이 되어 나를 더욱더 단단하게 해 주었다.

불과 몇 개의 계절, 몇 번의 발걸음 후에 다른 빛깔의 나무를 마주치는 것은 여전히 어색하다. 나무는 제 시든 잎을 떨구면서 햇볕의 통로를 스스로 막았지만, 이제 내가 필요로 하는 햇빛 또한 뜨거울 이유가 없다. 욕망이 옅어질수록 그에 비례하여 시간이 얼마나 느리게 흐르는지, 지금껏 내가 부풀려온 욕망의 무게가 얼마나 가벼운 것들인지 난 이제 안다. 난 마침내 가볍고 더딘 시간 속에 놓여 있다. 그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세월이 이끌어준 것이다.

밀란 쿤데라가 사람은 청춘을 모르고 청춘을 맞고, 어른이 뭔지 모르는 채 어른이 되며, 늙음을 알지 못한 채 늙는다고 말했듯이, 우리 인생의 불가해와 예측 불능이 언제 끝날지 도중에는 알 수 없다. 다만 모든 때가 도달하고 난 뒤에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평생 납득하지 못할 난감한 삶을 소명하고 설득하고자 하는 일은 언제나 망연할 따름이다.

가을 초입에 마주한 내 모감주나무는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 되었다. 모감주나무는 여름내 무겁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서도 황금색 비처럼 찬란한 꽃으로 '존재의 위엄'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힘들고 속상할 때라도 '존재의 품격'으로 이겨내며 즐기라는 몸짓이었다.

나무 정령의 등불처럼 청아하던 꽈리는, 지금 외양은 비록 밉지만, 쇠보다 더 단단한 금강자 열매를 탄생시켰다. 집을 마무리한다는 낙성(落成)처럼, 떨어질 때라야 이루어지는 법이다. 이보다 더 숭고해 보일 만큼 나를 설득하는 가르침은 없었다. 나의 모감주나무는 지나온 매시간이 당당했으니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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