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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에세이스트

그는 동해바다 속초, 삼포에 있었다. 그녀는 남해 땅 끝 해남의 바닷가에 서있었다.

불과 얼마 전, 그는 사방이 탁 트인 필리핀 어느 식당에서 입안에 소주를 털어 넣으며 '살라미스 해전'을 읽었다.

연휴가 시작되는 날, 그는 예술의 전당에 실내악 연주를 들으러 갔고,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듯 러시아 작곡가의 음악을 전율하며 들었다.

피아노에서 바이올린과 첼로로 흐르는 음들의 긴장감을 연주 내내 품은 채, 하얀 자작나무 숲에 눈이 내리고, 눈썰매가 바람처럼 지나가는 풍경을 머릿속으로 그려갔다.

그리고는 중국 대화가의 새우, 게, 생쥐, 병아리, 호박, 나팔꽃 등의 그림을 보고난 후 삶이 가끔씩은 터무니없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대학선생인 그녀는 세미나 발표에 지친 학생들에게 아이스크림을 90개나 나눠주면서,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예쁘고 귀엽고 대견하고 사랑스럽다고 연신 말했다.

틈틈이 그림을 그리는 그녀는 버킷리스트중 하나를 완수하기 위해 바리스타 자격증을 딴 후 자그마한 커피가게를 열었으며, 수십 가지 이국의 음식을 거뜬하게 요리하기도 했다. 스스로 1인 N역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던 그녀가 아름다운 여주인공이 나오는 세편의 영화를 보고난 후 연휴기간에 훌쩍 여행을 떠났다.

서울을 거쳐 해남까지 450㎞, 중심에서 땅 아래까지, 땅 끝에서 다시 중심으로 거슬러 오르는 길, '고구마 헌책방'에서 구입한 파울로 코엘료의 책 몇 권을 손에 들고서 코엘료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떠난 길이었다.

길 떠난 그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난 눈이 시렸다. 난 머물렀으나 그들은 떠났고, 길 떠난 그들의 풍경이 내게도 비근하였다.

그가 100년 묵은 밤나무가 밤송이를 다 떨구고 겨울을 기다리는 길을 거닐 때, 나도 함께 걸었다.

소주 한 병, 캔 맥주 하나 사서 바닷가 빈집에서 두부를 부치고 게탕을 끓여 혼자 밥을 먹을 때 나도 함께 먹었고, 새벽에 깜빡 잠이 들어 악몽을 꿀 때 나도 그 꿈이 무서웠다.

군데군데 갈매기들만 무리지어 해안선을 따라가는 그 길에 그는 혼자였다. 문득 뒤돌아보면 그의 발자국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하지만 나도 그 길에 내 발자국 하나를 보태고 있었다.

동해에 서있던 그는 고교시절 나와 한방에서 하숙을 했다. 군대 제대 날엔 제일 먼저 내 신혼의 단칸방을 찾은 친구였다. 남해의 땅 끝을 거닐던 그녀는 대학시절 송년모임 때 당차게 사회를 보던 후배였다.

그로부터 30여 년간 각자가 걷던 길을 훌쩍 넘어, 난 그들의 발걸음을 되짚었다.

동해와 남해의 해각(海角), 육지의 마지막 시점이 있는 곳에서, 그와 그녀가 각각의 수평선을 응시했을 때, 그들은 이미 뿔처럼 삶의 중심에 우뚝 서 있음을 난 알았다.

기원전의 살라미스 전투를 알고자 하는 친구, 수천 년간 이어져온 순례자의 길을 걷고, 길들지 않는 영혼의 연금술을 꿈꾸는 자, 혹은 미칠듯한 사랑과 자유를 구했던 코엘료에게 무수한 질문을 던지며 걷는 후배는 아직 뜨거웠다.

일상의 모든 장면을 시와 그림, 음악과 춤과 영화로 만들 줄 아는 그들은 누구보다 젊고 아름다웠다.

삶에서 우리가 궁극으로 구하고자 하는 것은 삶의 핍진한 의미와 살아있음의 뜨거운 경험 단 두 가지임을, 난 그들이 걷던 길에 그 명제를 다시금 되새겼다.

그는 연휴동안 걸었던 해안길이 솜사탕처럼 달콤하다고 하였다. 그녀는 땅 끝까지 닿았던 그 길이 '나를 찾아 떠나는 완벽한 여행'이라 하였다. 가을은 그렇게도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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