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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에세이스트

정오만 되면 경찰서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시골에 변변한 시계 하나 없던 시절에 하루의 시간을 가늠하게 해주던 소리였다. 위험을 알리는 소음이 아닌 친숙하고 고마운 소리였다. 내 아들이나 손자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불과 50년 전 이었다.

해 뜨기 전, 마을을 깨우는 것은 화통 기차의 기적소리였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증기기관차가 가끔 다녔다. 쉭쉭 대는 증기를 뿜으며 육중하게 움직이는 기차의 시커먼 몸통과 경이로운 몸짓에 난 압도당했다.

경북의 가은역은 기차의 종착지이자 출발역이었다. 그 산골에서 새벽부터 출발하는 기차는 구랑리역을 지나, 문경선의 마성역과 불정역을 거쳐, 당시엔 주변에서 큰 도시로 불리던 점촌역으로 연결되었다.

많은 형들이 점촌에 있는 고등학교로 통학했다. 하교 때마다 군대 워커를 신고 역에 도착도 전에 열차에서 뛰어 내리는 큰형을 볼 때면 존경스러웠다. 깊은 물이 흐르는 철교에 닿기 전에 뛰어내려야만 안전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일이었으나 아마 사춘기 소년들의 담력 자랑이었으리라. 모든 형들이 그렇게 뛰어내리던 시절이었다.

그 어린 시절이 지나고 모두 자그마한 기차역을 떠나 대처로 나갔다. 내 친구들은 거의 대구로 떠났다. 나만 청주로 유학해 난 대구역 전의 김천역에서 내렸다. 조치원역을 향해 기차를 갈아탈 때 내 심정은 묘한 이질감으로 심란했다. 모두가 가는 길을 벗어나 다른 길로 접어든 자의 두려움과 외로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충북에서 고등학교, 대학교를 마치고 정착한 후 난 이곳에서 평생을 보냈다. 맨손으로 일가를 이루고 애들 둘도 이곳에서 장성해 독립했다. 난 이제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오늘로써 출근할 날이 딱 4일 남았다. 40년 넘게 살아온 이곳을 난 이제야 되돌아볼 여유가 생겼고, 내가 스쳐 지나갔던 작은 간이역들이 그리워졌다. 지금은 유년의 낡은 사진처럼 세월 한편으로 사라져버린 장소, 그 간이역을 한 줌 떨림과 추억으로 떠올리게 된 것이다.

기차가 정해진 길을 따라 앞으로만 질주하듯 나도 그렇게 달려왔다. 비둘기호라는 예쁜 이름으로 불리던 완행열차에서 통일호, 무궁화호, 새마을호를 거쳐 고속열차로 바꾸어 타듯이 나도 오로지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속도를 더해왔다. 기차가 다른 길로 방향을 바꾸거나 뒤로 물러설 줄을 모르듯 내 삶도 그러했다. 오직 먹고 살기 위해 버둥거려야 했고, 어린 새끼들을 남들보다 뒤떨어지지 않게 키워내야 했고, 번듯한 집도 장만해야 했다. 말 그대로 그렇게 생존했다.

느릿느릿 완행열차가 멈추어 서던 간이역이 내 출발지였듯이 이제는 그 호젓한 간이역이 내 종착역이 될 것임을, 정선선 구절리역 철길 옆에서 나부대던 붉은 맨드라미나, 철암역부터 춘양역까지 낙동강 협곡을 따라 굽이굽이 도는 강물의 반짝임, 하늘도 세 평, 꽃밭도 세 평인 영동선 승부역의 따스한 불빛이 내가 항상 그리워했던 풍경임을 난 이제 확신하게 되었다.

목적지를 향해 속도를 더해가는 시간에서 비켜난 간이역처럼, 난 이제 느리고 넉넉한 그리움의 장소를 향해 되돌아갈 것이다. 내 자식이나 손주들이 속도의 강박에 시달리며 밤새 불편한 잠에 시달린 후에도 맘 편히 불쑥 찾게 되는 소박한 간이역을 난 다시 지을 것이다.

매미 소리 가득한 여름철, 철로 변 코스모스가 가을볕 아래나 비바람에 하늘거릴 때나, 추위에 발 구르는 눈 내리는 겨울, 햇볕 따스한 봄날에도 난 그곳에서 늙은 역무원처럼 개찰구를 지키며 자식들을 맞을 것이며, 모두가 머물고 싶은 삶의 포근한 모퉁이를 가꾸는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내 생애에서 한 획을 긋는 지금, 간이역에서 듣던 궁근 기적소리처럼 난 이제야 담박하고 편안해졌으니 세상살이의 참맛이 정녕 이런 것이 아니겠냐고 자문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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