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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4.05.20 14:58:57
  • 최종수정2024.05.20 14:58:57

구본숙

미술평론가·수필가

17세기 유럽은 상공업 중심 부르주아의 경제적 성장으로 이들이 절대 군주의 정치를 지지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화려하고 웅장한 바로크(Baroque)양식은 부를 축적했던 부르주아의 미의식과 맞았다. 특히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절대왕정 확립,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부르주아 계층에서 권력을 상징하는 일환으로 바로크양식이 발달했다.

미술의 경우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명암대비, 대각선 구도를 활용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etemisia Gentileschi, 1593-1652 혹은 1656 추정)의 작품 『홀로페우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에서 이러한 바로크적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어두운 검은 배경에 조명을 비추듯 인물만이 부각 되었다. 목에서 피가 솟구치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여 사실성과 생동감이 최고조에 달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한 여인이 분노에 가득 찬 표정으로 남자의 머리를 짓누르며 서슬 퍼런 칼로 목을 베고 있고, 다른 여인이 남자를 있는 힘을 다해 남자를 누르며 제압하고 있다. 작품에서 드러난 인물의 감정과 행위가 몹시 끔찍한 장면이다. 어떤 연유에서 이토록 잔혹하고 복수에 들끓는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까.

주인공 유디트는 성경 속 인물이다. 그녀는 전쟁이 일어나자 나라를 위해 적장 홀로페우스를 유혹한다. 유혹에 넘어간 홀로페우스는 마침내 그녀에게 피살을 당한다. 유디트는 유대인으로서 홀로페우스를 죽이지 않았다면 나라가 위태로웠을 수 있을 상황에서 용감함을 보여주었다. 동시대의 화가 루벤스와 카라바조도 유디트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지만, 젠틸레스키가 보여주는 유디트의 격렬한 감정묘사가 더욱 생생하게 와 닿는다.

젠틸레스키는 바로크 시기의 여류화가로 당시 여성으로서 꿈을 펼치기 어려웠다. 미술에 재능이 있었기에 아버지의 도움으로 그림을 배울 수 있었다. 아버지의 친구이자 화가인 아고스티노 타시를 소개해 주었고 부푼 마음으로 그림을 배웠다. 그러나 17세의 나이에 스승에게 강간을 당하고 만다. 여러 차례 강간을 당하고 결혼까지 하자고 했던 타시에게 두려움과 환멸을 느꼈다. 견딜 수 없어 소송을 걸었지만 타시는 거짓 증인과 가담하여 부정하였다. 젠틸레스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손가락을 옥죄는 고문과 처녀성을 잃은 증거를 보이는 수모를 겪었다. 마침내 소송에서 이겼지만 타시는 8개월간의 옥살이 끝에 자유의 몸이 되었고 젠틸레스키는 평생토록 극복할 수 없는 트라우마를 겪어야만 했다. 소송은 피해자에게도 논란의 중심이 되는 일이라 그 모든 리스크를 감당하고 추진했을 것이다. 이후 고향인 로마를 떠나 피렌체에서 활동하게 된다.

작품 속 유디트의 얼굴은 젠틸레스키 본인의 모습이다. 적장 홀로페우스는 타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울분과 분노, 복수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까닭이다. 믿고 배우며 존경했던 스승의 위선과 거짓에 배신감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작가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가해자가 뻔뻔할수록 마음속 괴로움은 어떤 방법으로도 치유되지 않는다. 타시가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 어린 사과를 했더라면 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지워지지 않은 오랜 시간의 아픔 속에서도 세상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 법과 사회가 지켜주지 않았던 고통과 괴로움을 자신의 방식으로 홀로 맞서고자 했다. 마침내 르네상스 시대부터 예술가를 후원했던 메디치 가문에서 젠틸레스키의 재능을 인정하고 후원했고, 피렌체의 유명인사가 되어 다시금 부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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