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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을 따르지 않는 기품

신사임당의 묵포도도

  • 웹출고시간2022.02.20 14:38:24
  • 최종수정2022.02.20 14:38:24

구본숙

미술평론가·수필가

신사임당은 조선 시대를 아울러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여류 화가이다. 유교 사상이 만연한 조선 시대에 여성이 자신의 꿈을 펼치기 쉽지 않다. 현명한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다하며 화가로서의 소임을 다한 모습이 오늘날까지 여성들의 귀감이 된다. 신사임당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림을 잘 그렸다. 신사임당이 7세 무렵 아버지가 보여준 궁중 화가 안견의 작품을 본떠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데 이는 원작에 버금갈 정도의 실력이었다.

신사임당의 실력이 출중한 만큼 그의 아버지 역시 교육에 힘썼다. 왕실에서 그려진 귀중한 그림을 딸에게 보여주기 위해 가져왔다는 것은 부모로서 좋은 작품을 접하게 해줄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부단히 마음 썼음을 알 수 있다. 신사임당은 19세에 남편 이원수와 결혼 후 친정에서 자녀를 낳고 키웠다. 친정에 머무를 수 있도록 배려한 딸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 한없이 느껴진다.

조선 시대 여성은 출가외인이라 하여 결혼 후 대부분 친정과 멀어졌다. 시댁에서 며느리의 재능을 인정해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도록 힘써 줄 시대적 배경도 아니었다. 그러나 신사임당의 부모는 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친정에 머물며 작품활동과 육아에 매진할 수 있는 적합한 배경을 제공했다. 신사임당 역시 자신이 받았던 교육처럼 자녀를 훌륭하게 양육했다. 조선 시대 문인이자 정치가인 율곡 이이, 어머니에 버금가는 화가인 딸 이매창, 아들 이우 등 7남매를 키웠다.

신사임당이 활동한 조선전기의 미술 양식은 중국 북종화의 영향을 받고 한국 화가의 개성이 더해진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전체적으로는 호방하고 시원스러운 수묵 산수화가 유행했다. 신사임당은 주류적인 작품을 그리기보다 삶 속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소박한 소재를 대상으로 섬세한 필력으로 그림을 그려나갔다. 주로 풀벌레나 꽃과 열매, 식물 등을 그렸다. 직업 화가가 아니기에 소재의 자유로움을 펼칠 수 있었다. 유행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전기 미술에 다채로움을 더해주는 평을 받고 있다.

신사임당은 일상생활 속 언행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깃든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날 마을에서 잔치가 열려 많은 이들이 오갔는데, 그중 한 명이 어느 부인의 비단 치마에 실수로 음식을 쏟고 말았다. 서로에게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신사임당은 침착하게 그 여인의 치마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주었다. 이 그림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묵포도도'이다.

2009년 6월부터 발행된 5만 원권 지폐 앞면에서 묵포도도를 볼 수 있다. 우아하면서도 탄력과 생동감이 깃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엷은 담채로 그려진 포도는 먹의 농도를 달리해 포도의 색감을 유려하게 표현했으며 선을 나타내듯 미세하게 겹쳐지지 않는 잎과 포도, 포도알 사이사이를 능숙하게 그려냈다. 막힘없이 뻗은 포도 줄기는 자신감 있는 빠른 필력을 보여주고 있다. 포도 가지와 넝쿨은 원근법을 따르고 있으며 뒤쪽 부분을 흐리게 그려 입체감을 나타냈다.

신사임당이 남겼던 '기품을 지키되 사치하지 말 것이며, 지성을 갖추되 자랑하지 말라'고 한 바와 같이 삶 속에서 타인을 배려하며 부모로서 조선 유일의 여류 화가로서 자신이 가진 신념을 지키고 본분에 소임을 다한 아름다움 삶이 작품 속에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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