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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박중겸 청주하나병원장

시골 '촌놈'에서 아시아 '명의'까지, 한 길만 달려온 열혈 의사
전남 함평 시골서 태어나 고교까지
명문 법대·외대 지망하던 학창시절
가정형편 탓에 전남대 의예과 진학
의사 되고나서 누구보다 독종 생활
청주 한 종합병원서 제의 받아 정착
의료취약지역이던 곳에 병원 개원
"이젠 의료 후진국 돕는 것이 도리"

  • 웹출고시간2017.06.18 19:34:23
  • 최종수정2017.06.18 19:34:41

박중겸 청주하나병원장이 한-몽 보건의료발전 통합 컨퍼런스에서 발언하고 있다.

ⓒ 청주하나병원
[충북일보] 기회는 우연찮은 계기에 찾아온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 달여 전 전남 함평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남자아이. 이 아이는 우연한 기회에 의사가 돼 아시아의 명의(名醫)로 거듭난다.

36년간 청주에서 어려운 이들의 치료를 도맡아온 박중겸(70·사진) 청주하나병원장.

박 원장은 올해 70세의 나이로 아시아를 누비며 아픈 이들을 치료하는 열혈 의사다.

그의 유년시절은 '촌놈' 그 자체였다. 논밭은 놀이터였고, 곤충은 장난감이었다.

광복 직후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어린 박 원장에게는 걱정이 없던 시절이었다.
2살 때 아버지를 여의어 '아버지'라는 단어가 낯설다는 박 원장.

하지만, 홀어머니 밑에서 4명의 누나, 2명의 형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박 원장은 "아버지는 기억 속에 없지만, 가족들에게 예쁨을 많이 받고 자라 철이 없었다"며 "그래서 그저 편히 사는 것이 좋았다. 게으른 성격도 이 때문인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학창시절을 "시골학교였지만, 공부는 잘했다. 고등학교를 1등으로 입학해 많은 선생님의 기대를 받았다"고 회상했다.

박 원장의 학창시절 당시 진학 목표는 의과대학이 아닌 법대와 외대였다.

수학에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부는 곧잘 했기에 서울 명문대학교를 꿈꿔왔다. 한 명문 외국어대학 영문과 입시시험까지 치른 그였다.

문제는 돈이었다. 어려웠던 가정 형편 탓에 서울로 유학 갈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차선책으로 선택한 곳이 전남대학교 의예과다. 이 선택이 박 원장의 인생을 바꿨다.

그는 "나름대로 공부를 잘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에 전남대에서도 가장 입학하기 어려웠던 의예과를 선택했다"며 "의사가 될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막상 입학하고 나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문과에 진학했다면 어디 시골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하다가 퇴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고 덧붙였다.

평소에는 게을렀지만, 의사로서의 그는 '독종'이었다.

20대 때 명문 대학 병원의 스카우트을 받을 정도로 실력자이기도 했다. 막상 의사가 되니 독일 유학을 결정할 정도로 학구열도 뜨거워졌다.

그러던 중 1980년 또 한 차례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청주의 한 종합병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마침 처가가 청주였던 박 원장은 이듬해인 1981년 청주에 자리를 잡았다.

박 원장은 "청주에 내려와 의사 생활을 하다 보니 대형병원이 부족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환자들이 너무 많았다"며 "결국, 의료취약지구에 병원을 짓기로 마음먹고 본격적으로 의료일선에 나섰다"고 했다.
그는 의사 생활을 하며 가진 노하우를 심·뇌혈관 질환, 척추관절 분야에 모두 쏟아부었다.

최근 심·뇌혈관 질환이 우리나라 사망 원인의 상위권에 있어서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맞게 되는 질병인 척추 등 관절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척추관절 분야는 모진 인생을 살아온 노인들을 위해 무수한 공을 들였다.

흔히 '빅3'라고 불리는 수도권 대형병원에서 의료진을 섭외해 청주권 최상의 병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청주한국병원을 거쳐 청주하나병원까지.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

현재 그가 원장으로 있는 하나병원은 그의 노하우를 집대성한 병원이다.

청주시 흥덕구 가경동에 하나병원을 지은 이유는 1998년 개원 당시 그 일대에 대형병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청주시 영운동에 있는 한국병원 개원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다.

박 원장은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환자들이 많이 거주한 곳에 병원을 만들고 싶었다"며 "이제 우리나라도 어느 정도 의료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왔다"고 했다.

세월이 흘러 우리나라 의료 기술이 선진국 반열에 들자 그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몽골·카자흐스탄 등 가까운 아시아 의료 후진국부터 시작했다. 현지 반응은 뜨거웠다.

그가 방문하면 선진 의료기술을 배우려는 현지 의료진과 진료를 받기 위한 현지인들로 병원은 북새통을 이뤘다.

해외 의료봉사부터 현지 병원과 진료협약까지 순식간에 이뤄졌다. 현지 반응은 뜨거웠다.

일흔의 나이에도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의 열정에 정부에서도 적극적인 지원을 해줬다.

이에 그치지 않고 현지 의료진들을 초빙해 최첨단 의료기기를 보여주고 선진 의료기술을 아낌없이 전수했다.

현지에서 수술할 수 없는 환자들은 하나병원으로 입원시켜 최고의 의료진으로부터 수술을 받게 했다. 수많은 외국인이 하나병원에서 질병을 치료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박 원장은 "의료의 본질은 결국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라며 "식습관이 서구화되면서 혈관계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이 높아지고, 나이가 들다 보면 척추·관절에 이상이 생기기 마련이기 때문에 이 분야를 중점적으로 키웠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와 인접한 몽골도 주로 육식을 하기에 혈관계 질환자들이 많다"며 "매우 가난한 나라기 때문에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는 안타까운 환자들을 돕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의료봉사와 현지 병원 방문, 협약 등을 위해 수차례 해외 일정을 소화해도 지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현지에서 많게는 하루에 40명의 환자를 진료해도 그의 표정은 밝았다.

박중겸(왼쪽에서 네번째) 청주하나병원장이 카자흐스탄 도스따르병원에서 현지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 청주하나병원
그의 마지막 목표는 의료 후진국들의 의료기술 수준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박 원장은 "우리나라 의료도 한국전쟁 이후 당시 의료 선진국이었던 미국·영국·일본 등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며 "의료 선진국이 된 지금에는 그 당시 우리나라를 도왔던 나라처럼 의료 후진국을 돕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의료 후진국에 직접 병원을 세우고 싶은 심정이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워 선진 의료기술 전수 등 간접적인 방법으로 도울 것"이라며 "현지에서 치료가 어려운 환자들은 지금과 같이 국내로 데리고 와 치료해주겠다"고 덧붙였다.

일평생을 아픈 이들을 위해 살아온 박중겸 원장.

그는 마지막으로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는 것이 보람 있고 즐거워 힘든지 모르겠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에게 이 길밖에 없었지 않나 싶다"고 웃으며 말했다.

/ 강준식기자 good120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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