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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7.08.03 18:30:12
  • 최종수정2018.03.15 16:50:22

지붕 공사를 하고 있는 청주고인쇄박물관.

[충북일보] 얼마 전 무형문화재 101호 금속활자장 임인호 장인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감동하였다. '한 권 남은 직지는 프랑스에서 반환을 거부하고 있고, 금속활자의 상징 같은 곳은 텅 빈 채로 있어 사명감 때문에 직지 복원 작업을' 했단다. 그는 직지 활자 복원 작업을 시작해 혼자 3만여 개의 활자를 만들고 하반신이 마비돼 치료를 받았단다. 복원을 위하여 5년 동안 하루 3시간 이상 잠을 잔 날이 없었다. 작업이 끝난 뒤 찾아온 공허감 때문에 생긴 마음의 병이라고 하지만 어찌 그뿐이랴. 제때에 못 먹고 못 자고 오로지 활자를 위하여 태어난 사람처럼 활자 복원에 혼을 불사른 것이다.

'혼(魂)을 잇지 못하면 무형문화재도 한낱 기술자'라고 말하는 장인. 정녕코 활자에 미친 사람이다. 활자 제작에 쓰인 몽당연필처럼 짧아진 칼들이 수없이 놓인 것만 봐도 그의 '직지' 사랑과 혼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금속활자용 먹으로 한지에 그대로 옮겨 찍을 때 느끼는 황홀한 감정'을 아는 장인이다. '그 순간만큼은 온 우주에 저 혼자 있는 느낌'이라고 말하는 그, 그의 무모한 열정이 직지의 가치를 더욱 높인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현존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를 기념해 만든 조형물.

청주는 직지(直指)의 본향이다. 직장에서 직진으로 십여 분만 달리면 직지의 거리에 닿는다. 도로를 경계로 예술의 전당과 직지의 터인 흥덕사지와 고인쇄박물관이 자리한다. 그리고 예술의전당 광장에는 우리 민족의 자랑인 거대한 직지(直指) 파빌리온이 펼쳐져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현존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를 기념해 만든 조형물.

'직지(直指)'는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다. '직지' 혹은 '직지심체요절'이라고 부르는 책의 원제목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에 독일의 금속활자본 '구텐베르크 42행 성서'보다 78년이나 앞서 간행되었다. 또한 '직지'는 인류문화사에 끼친 가치를 인정받아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지난 천 년 동안에 일어난 가장 위대한 사건이 금속활자 발명이다. 정보화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고 인류문화 발달사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금속활자본 '직지(直指)'가 탄생하지 않았다면 현재 세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아마도 서민은 책을 만져보기도 어려웠을 테고, 문맹은 지속되었으리라. 또한 가난한 지식인들은 나만의 책을 갖고자 손가락에 굳은살이 베이도록 필사를 했을 것이다. 1980년대 초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와 노트에 깨알같이 시를 베껴 적던 기억이 떠오른다. 직장에서 받는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시집을 사는 건 형편상 어려운 시절이었다. 여고 시절 책을 읽다가 명구절과 그 시절 암송하던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과 서정윤의 '홀로서기', 이해인의 '해바라기 연가' 등을 적은 필사 노트를 아직도 지니고 있다. 그 시절은 너나없이 어려운 시절이라 책을 지니기 쉽지 않아 필사한 경험이 있으리라. '필사'하면 존경하는 두 분이 떠오른다.

청주 흥덕사지.

책벌레, 책에 미쳐 손에서 책을 놓지 못했던 간서치(看書痴), 이덕무이다. 그는 스스로를 "책만 읽는 바보(看書痴)"라고 칭하고 '간서치전'을 엮었다. 그는 높은 열로 눈이 출혈이 된 상태에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추운 겨울에 손가락이 동상에 걸려도 필사와 독서를 멈추지 않았단다. 또 "추운 겨울 차가운 구들에서 홑이불만 덮고 잠을 자다가 '논어'를 병풍 삼고, '한서(漢書)'를 물고기 비늘처럼 잇대어 덮고서야 겨우 얼어 죽기를 면했던 사람"이다.

다른 한 분은 남편의 고모부님이시다. 고모님께서 아프시다는 소식에 댁에 들린 터였다. 소소한 대화를 나누던 중에 나의 수필집 '생각이 돌다'를 매일 새벽에 필사했다고 수필집과 노트를 꺼내 놓는 게 아닌가. 글씨가 깨알같이 적힌 노트를 한 장씩 넘기며 가슴이 뭉클해진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정갈한 글씨에 그 누구라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집안에 교수와 박사 등이 났어도 작가는 처음이라고 자랑스럽다는 말씀에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다.

정녕코 고모부의 필사는 정성이 아니면 어려운 일이다. 요즘 같이 바쁘고 과학문명이 발달한 시대에 누가 필사를 하랴. 직지는 우리 문명에 많은 부분을 편리하게 탈바꿈시켜 놓았고, 특히 인쇄술은 책의 대중화와 문맹 퇴치를 실현한 것이다. 요즘은 컴퓨터와 복사기, 인쇄술의 발달로 신간을 한날한시에 품 안에 안을 수 있다. 전 세계 아이들이 '해리포터' 시리즈 신작을 받아보려고 서점 앞에서 기다리던 아이들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였다. 21세기는 책의 홍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너도나도 구애 없이 책을 자유로이 출간할 수 있다. 이 모두가 금속활자 고인쇄술 '직지'의 힘이고 혜택이 아닌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현존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를 기념해 만든 조형물.

금속활자 발상지이자, 대한민국 위대한 문화유산의 고장인 청주이다. 한 권 남은 '직지(直指)'가 어서 본향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어딘가에 묻혀 있을 직지(直指)도 세상의 빛을 볼 수 있도록 '직지 찾기' 운동에도 적극 나서야 하리라. 무엇보다 최고의 인쇄술 도시에 걸맞게 '책'의 도시, '출판'의 도시로, '직지(直指)' 관련 체험 행사 및 다양한 콘텐츠도 개발되어야 한다. 이와 맞물려 청주시는 유네스코와 함께 '직지'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기념하고 세계기록유산 보존과 활용에 크게 공헌한 개인과 단체에 유네스코 직지상을 수여하고 있다.

광장에서 토론을 좋아했던 소크라테스는 책을 기억을 저해하는 대상이라고 경시하였단다. 그러나 그의 제자가 스승의 광장 토론을 글로 남겨 회자하고 있다. 역시 인간의 기록유산은 금속활자이다. 그 기록으로 우리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느낀다. 전통의 혼을 잇는 장인의 열정으로 청주문화유산을 바로 알고, 새로운 창조의 기회를 얻는다. 그럼에 '직지'는 인류 역사상 영원한 문화유산임이 틀림없다. 수백 수천 년을 기록할 변치 않는 단단한 활자가 여기, '청주'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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