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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의 '결' - 딱지본, 빛바랜 공간에서

국수 한 그릇 값의 소설, 책 대중화를 이끌다

  • 웹출고시간2015.07.02 14:40:41
  • 최종수정2015.07.02 15:01:31
아이들이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놀잇거리 "딱지"가 아니다. 한 시대 대중문화를 풍미했던 고서이다. 일정한 크기라 딱지를 접으면 안성맞춤, 빛깔도 알록달록 제격이다. 어린애들이 가지고 노는 딱지와 비슷하여 "딱지본"이란 이름으로, 또 당시 국수 한 그릇 값인 육 전으로 책을 살 수 있어 '육전 소설'이라고도 불린다. 고서가 액자 속에서 유난히 돋보인다.


한국을 대표하는 "2015 동아시아문화도시"로 선정된 청주이다. 중국의 칭다오, 일본의 니가타와 함께 청주에서 각종 문화 공연 및 전시가 열리고 있다. 나의 관심 분야인 "시민 애장품" 특별전을 찾게 된 것이다. 전시실은 연초제조창 낡은 동부창고, 건물 안으로 들어오니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다. 공간은 협소하고 천정은 뚫려 서까래가 보이고 분위기도 칙칙하다. 내가 상상했던 도서전은 박물관급 전시여서 그런지 실망스럽기가 그지없다.

정녕 전시장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장소다. 누가 봐도 농기구나 들어 있을 것 같은 허름한 창고가 아닌가. 급기야 고서 주인인 은사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어렵게 구하고 간직한 희귀본과 수천 권의 고서는 어디에 두고, 넓은 공간도 많은데 굳이 좁은 공간에서 전시하느냐고 묻는다.

곁에서 듣고 있던 총책임자인 그가 말을 꺼낸다. 고서와는 잘 어울리는 콘셉트라고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눈살을 찌푸렸던 서까래가 훤히 드러난 천장이다. 요즘 목재로 건축된 이런 견고한 천장을 어디에서도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공간이 바로 근대문화유산의 산실이란다.

도심 속 폐공장인 연초제조창은 해방 직후에 지어진 건물이다. 1945년 공장 문을 열어 2004년 문을 닫기까지, 장장 70년이라는 오랜 역사가 존재하는 공간이라고 역설한다. 그는 철거 위기의 근대문화유산의 공간을 살리고자, 일부러 이곳을 전시공간으로 정하였단다. 이어지는 설명에 공간의 의문이 풀린 우리는 고개만 주억거린다. 얕은 생각과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하는 병을 가진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다.

딱지본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진귀한 고서를 어디에서 만나랴. 고서를 통하여 그 시대의 문학과 문화, 풍습 등을 엿볼 수 있다. 책의 내용이 한눈에 드러나도록 표현한 유머러스한 겉표지는 우리나라의 인쇄술을 보여준다. 필사본, 목판본에 이어 서양 인쇄술 납 활자본으로 인쇄한 딱지본 소설이 책 대중화에 이르게 했으니 놀랍지 않은가.

그 시절에는 책을 사보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딱지본은 국수 한 그릇 값이라 저렴하다. 울긋불긋한 표지는 독자들의 호기심과 구매욕을 불러일으켰으리라. 한글에 그림까지 더하여 읽기가 수월하다. 작은 책이라 휴대하기 편하여 서로 돌려보기 좋았을 것이다. 구전으로 전해오던 옛이야기들 "홍길동전", "춘향전", "구운몽" 등에 새로운 이야기를 더하여 책 읽기가 서민에게 쉽게 전파된 것이 아닐까 싶다.

책은 단지 종이로 만든 물품일 뿐 아니라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는 매체다. 다양한 딱지본 소설에는 우리네 고단한 삶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딱지본이 성행하던 시기가 일제의 탄압과 수탈이 아주 심하던 시대이다. 책은 마음 둘 곳 없는 서민들의 삶의 비애와 신산함을 두루 어루만져 주었으리라. 또한, 이야기책 읽기는 현실을 어쩌지 못하는 속에서 마음의 여유를 갖게 하고, 영웅소설이나 권선징악의 내용은 대리만족으로 잠시라도 시름을 덜어주었을 것 같다. 고서는 과거의 책이 아니라 민족사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산증인이다.

근대문화유산의 산실에 어울리는 근대문학의 소산인 딱지본 소설. 진정 있어야 할 자리에 펼쳐놓은 것이다. 고서 수집을 위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아끼지 않은 은사님과 폐허의 공간 및 그 흔적을 지우자는 사람들 틈에서 근대유산을 지키고 알리고자 애쓰는 그. 두 분은 "문화로 나라를 지킨다."라는 신념으로 한국의 미와 문화유산을 지킨 대수장가 간송 전형필의 후예임이 분명하다. 그들의 남다른 정신과 근대문화유산 없이 어찌 현재의 문화가 존재하겠는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이면에는 우리가 모르는 옛 문화와 정신이 살아 숨 쉬고, 역사가 진중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대 산업을 좌지우지했던 담배공장에서 열정을 바친 선인은 돌아가고, 후인은 옛사람이 남긴 삶의 궤적을 살피고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 불이 꺼진 담배공장에서 소중한 것을 망각하고 새로운 것만을 탐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옛것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라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이 가슴에 와 닿는 순간이다.

내 고향 청주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의 고장이다. 그에 걸맞게 문자문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해야만 한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들의 적극적인 관심인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 관심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라는 "사랑의 기술"은 인간만이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문자문화가 성장하고, 생명력을 지속하려면 시민의 깊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오래되고 손때 묻은 것이 편안하지 않다. 외국에선 일부러 낡고 허름한 공간을 찾아 스토리텔링을 한단다. 우리 고장에는 70년 역사가 절절히 배인 빛바랜 문화공간이 있는데 무엇이 부족하랴. 전시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어두운 창고에서 전통문화유산을 세상 밖으로 불러내 생명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어서 폐공장의 화려한 변신을 보고 싶다. 이곳에서 남녀노소 다정히 앉아 옛이야기도 나누는, 문화예술 사랑이 강물처럼 흐르는 장이 되길 원한다.

/ 이은희 작가

이은희 작가 약력

충북 청주출생, 충북대학교 경영대학원졸업,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2004년『월간문학』등단, 2004년 동서커피문학상 대상, 2007년 제물포수필문학상, 2010년 충북수필문학상, 2012년 신곡문학상 본상, 2013년 충북여성문학상과 제4회 민들레수필문학상 본상 수상. 2013년 국립청주박물관 사진공모전 금상 수상, 2015년 김우종문학상 본상 수상 외 다수.

수필집 '검댕이', '망새', '버선코', '생각이 돌다', '결'

수필선집 '전설의 벽'출간.

한국문인협회, 계간 '에세이포레'편집장, 충북수필문학회 주간 역임, 청주문인협회 회원, 충북여성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현) 계간 '수필세계', '에세이문예' 연재수필 집필 중, (주)대원 상무이사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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