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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희의 '결' - 맥놀이

千年의 울림… '종소리와 곡소리엔 정녕 깊은 울림이 있다'

  • 웹출고시간2015.09.03 14:30:04
  • 최종수정2015.09.03 19:11:14

진천 종박물관

천 년을 고이 잠든 양 침묵하는 성덕대왕신종이다. 장중한 기품을 간직하고 있지만 잔혹한 전설을 안고 있다. 수많은 이가 범종을 찾으나 종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없을 듯싶다. 비극의 종(에밀레종)이라 불려 종은 서러운 묵언을 고집하는지도 모른다.

시도 때도 없이 범종의 모습을 보고자 경주로 달려가는 건 내 위치에선 무리다. 얼마 전 한나절 걸려 종각 앞에 설 기회가 주어진다. 손을 내밀어 종의 몸을 어루만질 순 있으나 정작 종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상황이 이러한데 성덕대왕신종의 육중한 몸통과 소리가 따로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도 뜬금없는 소릴 한다고 눈을 치켜뜰지도 모른다.

범종을 재현한 종박물관이 충북 진천에 존재한다. 종소리를 듣고 보고 만지고 종을 직접 다룰 수 있는 곳이다. 종의 변천사와 문화, 특히 남다른 한국의 종을 탐구할 수 있어 좋다. 우리 고장에 종의 진가를 알리는 명장이 있어 자랑스럽다. 나는 괜스레 마음이 헛헛해지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나, 심금을 울리는 종소리가 그리워질 때 박물관을 이따금 찾아들곤 한다.

종박물관은 버튼 하나로 시대별 종의 역사와 종소리를 구분한다. 세계 여러 나라 종을 비교하여 들을 수도 있다. 에밀레종 종소리 버튼을 누르고 두 눈을 감아보자. 이어 "댕~"하며 종의 첫 소리는 귀가 번쩍 뜨일 정도로 웅장하다. 웅근 소리가 세상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울림의 파고는 점점 하늘과 땅, 만물을 깨워 하나가 되리라.

종소리는 커졌다가 점점 가늘어진다. 끊길 듯 끊길 듯, 가늘어졌다가 은은한 여운을 남긴다. 주위가 고요하다. 감았던 눈을 뜨자 내 영혼을 흔들던 종소리의 흔적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아직도 나의 귓바퀴 안에는 그 울림이 살아 감돈다. 이내 나를 알 수 없는 공간에 가둔다. 울림의 비밀을 풀기도 전에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생거진천대종각

상주의 곡소리가 애절하다. 그 애통함이 나의 피돌기를 빠르게 움직여 억누르고 있던 감정을 뒤흔든다. 눈물이 핑 돌아 상주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다. 어눌한 표현으로 동료의 슬픔을 어루만지고 있다. "어찌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고개를 드니, 그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이내 나의 눈시울도 뜨거워진다.

나는 상주와 고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그분이 어떤 병으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그 자리에서 들었을 뿐이다. 그저 동료가 삼 형제 중 막내이고 고인과 각별한 정이 들었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그의 곡소리와 눈물은 생면부지의 고인 앞에서 마음의 동요와 눈물을 자아낸 것이다.

도시에서 볼 수 없는 낯선 장례 문화다. 멍석이 깔린 빈소에 고인에 대한 예(禮)를 갖춘 상복과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요질을 두른 고개 숙인 상주의 모습이다. 여인들은 삼베 치마에 짚신을 신고 어석거리며 음식을 내오느라 분주하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울린 건 상주의 곡소리다. 그리 애절하게 통곡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상주의 곡소리엔 깊은 울림이 있다. 그 여운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평소 나의 조문은 상주와 함께 진심으로 슬퍼하기보단 그저 예(禮)를 갖추는 정도다. 혹여 상주 앞에서 애써 슬픈 표정을 짓지 않았는지 돌아본다. 어떤 이는 이런 장례 문화를 보고 형식에 얽매인 거 아니냐며 꼬집는다. 하지만 나에겐 전통을 이어가는 모습과 고인을 진정으로 위하는 모습이 종소리처럼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내 마음을 흔든 상주의 곡소리와 종의 슬픈 전설이 맞닿아서일까· 에밀레종의 전설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하지만 우리의 민요와 판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한이 서린 민족이라는 말이 맞는 것이 성싶다. 그래선지 종소리에서도 슬픈 감정이 배어난다. 하지만 성덕대왕신종 종소리에 여운의 비밀은 맥놀이 현상이란다. 종을 만든 남다른 선인의 기술 덕분이라지만,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소리는 종을 만든 이의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그만의 독특한 '울림음'을 만들었으리라 본다. 범종의 은은한 여운은 그 시대의 선인의 삶을 은유적으로 대변한 것이 아닐까싶다. 어쨌든 천여 년 전에 맥놀이의 원리를 깨치고 제조하였으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후인은 '비움과 채움'의 진리를 이제야 캐낸 격이다.


현대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일정한 형태로 시각화하길 좋아한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을 쫓아다니다 지쳐 돌아온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몸 안에 온 감각이 열리도록 두 눈을 감고 귀를 열어두자. 달팽이관을 통과하여 오감을 깨우거나 순수감성의 자아를 찾은 소리를 향유하자. 문명의 발전으로 알게 모르게 뒷전으로 밀려나 사라진 소리를 더듬어 본다.

밤의 적막을 깨트리던 다듬이질 소리와 달구지를 끄는 황소 목에 단 워낭소리가 정겹다. 고즈넉한 산사의 침묵을 깨트리는 풍경 소리는 또 얼마나 청아한가. 풍경소리를 매일 듣고 싶어 거실 창에 종을 걸었는데 소리가 다르다. 역시 도시의 소음 속에선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없나 보다.

나는 늘 디지털과 아날로그 틈에서 헤매고 있다. 현실에서 얻지 못한 것을 비대칭 속에서 얻으려 방황한다. 종소리와 곡소리엔 정녕 깊은 울림이 있다. 그 울림은 지친 영혼을 어루만지고 옛 물상과 문화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범종의 첫소리에 나쁜 기운은 사라지고 영혼은 맑아지리라. 시공간을 초월한 울림으로 온몸에 감미로운 전율이 흐르리라. 그 기운으로 여러 날 세상을 거뜬히 살아낼 것이다.

이은희 작가 약력

충북 청주출생, 충북대학교 경영대학원졸업,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2004년『월간문학』등단, 2004년 동서커피문학상 대상, 2007년 제물포수필문학상, 2010년 충북수필문학상, 2012년 신곡문학상 본상, 2013년 충북여성문학상과 제4회 민들레수필문학상 본상 수상. 2013년 국립청주박물관 사진공모전 금상 수상, 2015년 김우종문학상 본상 수상 외 다수.

수필집 '검댕이', '망새', '버선코', '생각이 돌다', '결'

수필선집 '전설의 벽'출간.

한국문인협회, 계간 '에세이포레'편집장, 충북수필문학회 주간 역임, 청주문인협회 회원, 충북여성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현) 계간 '수필세계', '에세이문예' 연재수필 집필 중, (주)대원 상무이사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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