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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4.04.03 14:47:02
  • 최종수정2024.04.03 14:47:02

임미옥

청주시 1인1책 프로그램 강사

가슴이 허허롭던 그해 겨울날, 동전만 한 눈이 종일 비처럼 퍼부었다. 약속한 적 없으나 누구라도 만날 것처럼 공연히 설렜다. 밖으로 나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으니,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 때문이었다. 장터 '맛나당' 빵집에 들어섰다. "이게 누구야! 이건 눈이 주는 선물이야!" 한 남자 선배가 반겼다. 나는 둥근 함석 난로 연통을 두 손으로 감싸 손을 녹인 후, 그와 마주 앉아 성냥개비를 쌓으며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음을 나누는 연인 사이가 아니어도 허한 가슴을 조금 정도 채울 수 있었다.

어느 겨울에는 영화 같은 일도 있었다. 그날도 아침부터 눈이 날렸다. 무작정 청주로 나와 눈을 맞으며 성안길을 걸었다. 양화점 앞을 지날 때 충동이 일었다. 들어가서 헌 구두를 버리고 새 구두를 신고 나와 사뿐사뿐 걸었다. 그러다 극장에서 영화 한 편으로 마음을 채우고 나오니 동전만큼 커진 눈송이가 쏟고 있었다. 음악다방으로 들어갔다. 쪽지에 자니 호튼의 '어느 소녀에게 바친 사랑(All For The Love Of A Girl)'을 적어서 뮤직 박스에 건네고 앉아 있다가 막차를 탔다.

버스에 올라 하늘을 보니 초저녁에 환하던 달이 숨어버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 고향으로 가던 버스가 중간쯤 가다가 미끄러워 더는 못 간다면서 내려놓고 가버리는 거다. 사람들이 순하던 시절이었다. 승객들 의사는 개의치 않고 한밤중 노상에 내려놓았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여기까지 데려다준 것만도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는 이도 있었다.

폭설로 버스가 더는 못 가는 것이 낭만으로 여겨졌다. 승객 중에 낯익은 청년이 있어서 설레기까지 했다. 나는 그와 함께 설원에 취해 먼 밤길을 걷게 될 것이다. 긴 행렬 속에서 영화 같은 로맨스가 생기는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아침마다 큰 기와집 대문에 기대서 내가 유치원 어린이 손을 잡고 출근하는 걸 바라보곤 했었다. 걷기 시작하자 쏟던 눈이 멈추고 뽀얀 달님이 나왔다. 달빛에 반사돼 하얗게 빛나는 눈길을 사람들은 패잔병들처럼 터벅터벅 걸었다.

그는 나보다 몇 걸음 앞서서 걸었다. 그림자처럼 조용히, 무심히 걷는 그의 어깨 위로 휘영청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걷고 걸어도 앞 그룹과 나와의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다. 내 보폭이 작아서 일행들과 점점 멀어지자 나 혼자 많이 뒤로 처지면 어쩌나 불안했다. 그때다. 그림자처럼 걷던 그 청년이 걸음을 늦추는 거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으나 나와 속도를 맞추어 천천히 걷는 것이 분명하다. 내게 신경 쓰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 보니 맨 뒤에 처진 건 우리 둘뿐이다.

그런데 그는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나 보다. 큰 기와집 대문에 기대어 내가 출근할 때마다 바라보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얼굴을 붉혀 설렘을 주더니 오늘은 목석이라도 됐나 보다. 길가 나무에서 푸다닥! 하고 새가 저쪽 나무로 옮겨 가거나 작은 동물이 지나는 기척이 날 때면 소스라치게 놀랐다. 백설 옷을 입은 나무들이 머리를 풀어헤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죽은 사람이 벌떡 일어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머리카락이 쭈뼛할 때마다 그의 팔을 잡고 같이 걷자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끝내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그럴 거면서 출근하는 나를 왜 바라보았을까. 큰 기와집에는 유치원에 다니는 여자아이가 살았다. 아침마다 나를 기다리다 저만치 내가 보이면 분홍색 핀을 머리에 꽂은 아이가 뛰어오면서 "선생님!" 하고 불렀다. 나는 아이 볼에 뽀뽀해 주고는 손을 잡고 출근했었다. 그는 나를 바라본 것이 아니었나 보다. 강아지처럼 촐랑촐랑 나를 따라가는 그 아이가 귀여워서 바라보았는가 보다.

유치원에 다니는 손녀를 둔 지금 내게, 영화 같은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난다면 어찌할까. 내가 먼저 말을 붙일 수 있을까. 출근할 때 매일 바라본 게 누구였냐고 물어볼 수 있을까. 그랬더라면 그날 새로 산 구두가 길들지 않아서 아팠던 발이 덜 아팠을 것이고, 백설 옷 입고 귀신처럼 서 있는 길가의 나무들이 무섭지 않을 것인데 말이다. 하얀 눈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신비를 담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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