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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미옥

청주시 1인1책 프로그램 강사

그림인가…. 글씨인가…. 송계 박영대님의 홍매화 작품이다. 노련하게 붓을 휘둘러 쓴 女자가 화폭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그 품으로 남자를 상징하는 子자가 몸을 기울여 들어오며 검은 꽃가지를 형성했다. 흐르다 멈칫, 흐르다 멈칫, 드리운 가지들이 결국 동체를 이룬다. 피어난다…. 정점에 이른 가지들 사이로 붉은 홍매화 이파리들이 점점이 피어난다. 고매한 미술작품이 감성을 적시며 아련한 기억의 문을 열고 달린다. 홍매꽃 이파리처럼 붉은 핏빛 사랑을 했던 큰언니가 생각난다.

친정집 뒤란 샘가에 홍매 나무가 있었다. 어느 봄날, 서울 언니가 내려왔다. 나는 큰언니를 서울 언니라고 불렀다. 언니는 봄날 내내 안방 뒷문을 열어 놓고 매화나무를 바라보았다. 언니는 말을 안 했다. 돌멩이도 기왓장도 아닌데 왜 말을 안 하냐고 엄마가 큰언니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세월보다 좋은 약은 없는 겨…." 하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가만가만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뿐이 아니었다. 서울서 돈 버는 언니 남편감이 보냈다면서 식구들 선물을 가지고 온 날, 부모님은 좋은 사람 만났다며 기뻐하셨다. 나는 그때 받은 분홍 줄무늬 원피스를 잘 때도 입고 잤다. 그런데 아버지 손에 끌려서 짐보따리를 싸서 집으로 내려온 거다.

큰언니는 죽음 같은 사랑을 했던 거다. 언니가 그 검은 강에 빠져있을 때 나는 여섯 살이었다. 내게 큰언니 이야기는 금기였다. 철없는 나는 언니에게서 풍기는 분 냄새가 좋아 언니 주변을 맴돌았다. 어느 날 흑백사진을 언니가 보여줬다. 사진 속에 눈이 똘방한 사내 아기가 누워서 장난감을 빨고 있었다. 누구냐고 묻자 언니는 울면서 어른들께 사진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말만 했다. 나도 그냥 따라서 울었다.

홍매화 꽃잎들이 날려 샘으로 들어가 빙빙 돌다 물결을 따라 고랑을 타고 수채로 떠갔다. 떠가는 꽃 이파리들과 매니큐어를 바른 언니 손톱 색이 같았다. "언니 손톱하고 똑같다." 했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니는 홍매화 꽃잎처럼 붉게 멍든 가슴을 봄날 내내 삭이며 울고 울더니 봄날이 가듯 홀연히 집을 나갔다. 그리고 엄마 말씀처럼 세월에 상처가 아물었는지 새로운 동반자를 만나 늦은 결혼을 했다.

작은 언니에게도 눈물 바람 봄날이 있었다. 하지 말아야 할 사랑을 했던 큰언니와 달리, 작은 언니는 너무도 이른 사랑을 했다. 그해 봄날, 한 청년이 우리 집 마당에서 밤새 무릎을 꿇고 있었다. 죄목은 중학교를 갓 졸업한 열일곱 살 언니에게 임신을 시킨 거였다. 바위 같은 아버지 마음을 눅지게 한 건, 몸을 뒤틀면서 밤을 새운 청년이 아닌, 홍매화 꽃잎처럼 붉은 눈물을 베갯잇에 뚝뚝 떨군 작은언니 눈물 바람이었다. 언니는 그 봄날이 가기 전에 면사포를 쓰고 어린 신부가 됐다.

사랑을 하는 일은 하늘을 나는 숭고함이다. 나뭇잎 하나 풀잎 하나까지 핑크빛으로 보이는 심상이다. 마음에 물든 사랑은 아름답지 않은 게 없다. 별처럼 휘황한 감정은 이성을 제압한다. 밀물이 갯벌을 덮듯 서로를 삼켜버린다. 가슴엔 시냇물이 넘치고 정서는 강을 따라 물결친다. 작은 풀벌레 움직임에도 생각은 날개를 단다. 쏟아지는 달빛을 받으며 둘이 걸으면 습지대도 자갈길도 황금 길이 된다. 하지 말아야 할 사랑이어도, 현실적인 계산을 못 한다. 그저 사랑하다 진심이 됐을 뿐이다.

한 나무가 내나 똑같은 새싹이 없고 똑같은 이파리가 없듯, 사랑 이야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나의 언니들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했다. 금단의 사랑을 했던 큰언니는 죽음의 강을 건너야 했다. 그리고 허허벌판에서 만난 무너진 성전을 바라보는 것처럼 쓸쓸함을 안고 산다. 작은 언니는 급히 떨어진 별똥별이 몸과 마음을 일시에 태워 삼켜버리듯 급한 사랑을 했다. 이도 저도 사랑이요, 세월이라는 수직 절벽을 타고 유장하게 흐르는 물처럼 그 이름은 변하지 않는다. 봄날은 간다. 간다는 건 유익한 일이다. 가면서 이름과 달리 사랑은 견딜 만큼 퇴색한다. 그렇지 않으면 삶의 행간에서 만나는 아픔이나 유쾌하지 않은 일들을 어찌 다 견디어 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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