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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교육학박사

어릴 적 우리 집은 근동에서 보기 드문 기와집이라 길 가던 사람들이 쳐다보느라 고개가 돌아갈 정도였단다. 안방에는 벽장이 있어 이불과 대 고리짝 두어 개가 놓였는데 이따금 숨바꼭질 때 올라갔다가도 그 고리짝 속이 무서워 화들짝 내려오곤 했었다. 오른 켠 앞쪽으로는 어머님 화장 그릇이 있고, 뒤로는 조청이나 약식 같은 먹거리가 이따금 숨겨졌지만 귀신같은 동생에게 그 정도야 낭중지물에 진배없다.

펄 벅(Pearl S. Buck)의 대지(The Good Earth)는 주인공 왕룽(王龍)의 부인 아란(阿藍)이 어릴 때의 경험으로 부자의 숨겨진 벽장을 찾아내 많은 돈과 보석을 손에 넣어 큰 부자가 되는 것으로 전개된다. 곡부의 孔家莊은 서책을 비밀 벽장에 숨겨 분서갱유를 피했다 하니 이렇듯 부자들의 벽장은 보물을 비밀스레 갈무리하는 금고이다.

우리 벽장 겸 다락은 이불 올리기에 편하도록 4쪽 미닫이문을 달았으니 비밀스러운 금고와는 거리가 먼데도 보물이 담긴 벽장으로 기억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동네 아줌마가 우리 부모님에게 병구(병규라는 발음이 어려워 동네 어른들은 이렇게 불렀다)가 유별나다고 말했다. 다른 애들이 구들을 덮은 짚자리 위에서 뛰노느라 흙먼지 펑펑 날리는 북새통 속에서도 속표지가 너덜너덜한 『영문학 개론』을 붙들고 있더라나.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잡던 때였나 본데 아줌마 눈에는 그게 신기했나 보다. 그 후 벽장 속 내 손이 갈만한 곳에 『세종대왕』과 『을지문덕 장군』 두 권이 놓여 있었다. 초등학교만 나오신 아버님이 큰아들을 위해 장날 쌀과 바꿔 사 주신 선물이다. 당연히 금세 독파해 버렸고 이어서 아버님이 읽고 계시는 와룡생의 무협지랑 『삼국지』 등을 몰래 먼저 읽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이불 뒤집어쓰고 남폿불에 비춰 읽느라 아침이면 그을음 때문에 세수하며 코를 풀면 새까만 코가 나왔었다. 중학교 가기 전에 삼국지의 등장인물을 다 외웠고 일리아드와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읽었더니 2학년 사회 교재에 나오는 그리스와 로마의 인물 이름 외우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동서양 위인에 관한 관심과 더불어 책을 가까이하게 된 계기는 오로지 아버님의 고단수 마음 쓰심 덕분이다. 아무리 내가 책을 좋아한다손 '이 책 비싸게 사 왔으니 꼭 읽어 봐라!'라거나 '이 책 다 읽고 독후감을 말해 보라' 했으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아무런 말씀 없이 벽장 속에 책을 슬며시 넣어 지적 호기심을 유발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굉장한 교육 방법이다.

요즘 학생들은 위인에 관한 관심이 시들하여 염려된다. 학생들에게 위인과 스타를 구분해 보라 하니 위인은 위대한 사람 존경받는 사람이고 스타는 유명하거나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명쾌하게 답한다. 그런데 위인은 몇 명이나 알고 있느냐는 물음에는 자신 있게 대답을 못 한다. 대개의 학생이 스타의 이름만큼 위인을 모르며 설령 위인을 알아도 피상적이요, 그분들의 행적을 살펴 따르려 하지도 않는다. 과거를 거울로 현재를 살피고 위인을 통해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하거늘 대부분 이름값에 부족한 연예인에 견주니 못생긴 사람이요, 뚱뚱한 여자로만 자기를 비교하고 있다. 5천 년 역사를 이끌어 오는 동안에 인구 많은 중국에 필적할 만큼 현인들이 많음에도 이순신 장군과 직지처럼 오히려 우리나라의 자랑거리를 다른 나라에서 배우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가을 들어 도산서원 前現 재유사 중 뜻있는 몇 간이 모여 조선 중묘조 충재 권벌 선생이 소매 속에 항상 넣어 다니셨던 『近思錄』을 공부하고 있다. 동학 서생들이 전국에 흩어져 살므로 zoom을 통해 공부하지만, 그 맛이 진하고 쏠쏠하긴 매한가지이다. 마음에 새길만 한 책을 가까이함 만도 좋은데 나이 들어도 책 읽는 즐거움이 진진하여 더 좋다. 이는 벽장 속에 보물을 넣어 인생의 즐거움을 베풀어 주신 先親의 은혜라 새삼 감사를 드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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