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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서

전 옥천군 친환경 농축산과장

오늘도 나는 여느 때와 같이, 고구마로 점심을 때웠다. 마지막 남은 한 개를 손에 들고 동네 골목으로 나갔다. 옆집에 사는 사촌이자 친구를 만났다. 아침도 먹지 못한 친구가 나를 보더니 애원한다. "야! 친구야, 나 좀, 한 입만…"하며 달려든다, 철없던 나는 장난기가 발동했다. 안~ 돼, 하면서 껍질을 까서 땅에 던지고 혼자 먹었다. 순간 친구는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내가 버린 고구마 껍질을 주워 먹고 내입만 처다 보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철없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고 가슴이 쓰리다.

배고픔, 동족상잔의 비극 6·25 전란이 끝난 직후 태어난 세대들은 누구나 겪었던 아픔이다. 자식들은 많은데 양식은 떨어져 밥은 고사하고 죽도 못 먹던 시절이다. 그때 구황작물로 많이 먹은 것이 바로 고구마다.

어린 시절 겨울 양식으로 가장 많이 먹었던 것이 바로 고구마였다. 방 한구석에 수수깡으로 고구마 통가리를 만들어 쌓아놓고 겨우내 먹었다. 점심에는 무조건 고구마가 주식이다. 저녁에도 간식으로 생고구마를 깎아 먹었다. 눈이 오면 눈 속에 하룻밤 묻어놓아 살짝 얼려 먹으면 무척 달고 맛있었다. 그 때는 오늘날처럼 봄에 일찍 고구마를 심지 않았다. 보리를 수확하고 후작으로 여름에 고구마를 심었다. 지금처럼 맛은 좋지 않았으나 수확량이 다른 작물에 비하여 많았다.

자식들이 배는 고픈데, 양식이 떨어져 아무것도 먹이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겨우 초등학교 졸업한 큰 누나는 굶지 않기 위하여 식모로 보냈다.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려온다. 둘째 누나는 가발공장으로 보내고 중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수 진성의 '보릿고개' 노래가 가슴에 와 닿다. 작년 가을 수확한 양식은 바닦이 나고 아직 보리는 익지 않아 식량이 떨어져 굶던 시절이다. 춘궁기라고도 불렀다. 그 시절 가장 귀한 존재가 식량이다, 그중에도 최고는 쌀이다. 쌀은 부의 상징이었다. 머슴들도 세경이라 하여 쌀 몇 가마로 일년 임금을 책정하였다. 친목회나 위친계 같은 모임도 애경사가 생기면 현금이 아닌 쌀로 지급하였다. 명절 때나 제사 때 외에는 쌀밥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겨우 아버지 밥그릇 가운데 만 조금 쌀밥이 있었다.

1970년 대 초, 마침내 박정희 대통령이 통일벼를 개발보급 함으로써 우리 민족을 배고픔에서 구해낸 것이다. 필자도 기억이 생생하다. 종전에는 보통 추청벼(아끼바래)를 심으면 겨우 20가마 정도 수확하던 것이 통일벼를 심으니 50~60가마로 2배 이상 수확량이 증가하였다. 물론 밥맛은 떨어지고 탈립이 심하여 수확하는데 어려운 점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식량 걱정은 하지 않았다.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공.과가 있다. 그러나 반만년 유사 이래 진짜 국민을 배고픔에서 구해낸 대통령임에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칠순을 바라보는 지금 자식들 키워서 내보내고 손자들까지 어느 정도 다 키웠다. 이제야 돌아보니 옛날 부모님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마음이 아팠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며 온다. 배고픈 자식에게 먹일 양식이 떨어져 안절부절하던 어머니, 초등학교를 졸업한 딸자식을 중학교도 보내지 못하고 남의 집 식모, 아니면 가발공장으로 보내던 부모의 마음 어떨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멍하다. 그런 부모님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불효부모 사후회" 란 말이 나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우리 유년 시절에는 초등학생도 봄이 되면 밭에 나가 부모님 일을 도왔다. 여름에는 소풀베어 먹이고 겨울에는 지게 지고 산으로 땔감 구하러 다녔다. 오직 잘살아 보겠다고 서독 간호사로, 광부로 갔다. 월남 전쟁터에서 젊음을 받쳤고, 중동 사막의 모래바람 속으로 뛰어들었다. 오늘의 풍요와 자유가 이들의 덕분에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 젊은 청년들이 누리는 모든 것은 당신들 자신이 이룬 것은 거의 없다. 모두가 기성세대들이 흘린 땀과 눈물의 결과다.

나는 지금도 고구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고구마만 보면 그때 생각이 떠오른다. 친구가 배고파 "나 좀, 한 입 만…" 하며 간절히 애원하던 모습, 그 때 반쯤 주지 않고 혼자 먹었던 아픈 상처가 가슴 깊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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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규 충북도 경제부지사 "고향 발전에 밀알이 되겠다"

[충북일보] "'고향 발전에 밀알이 되겠다'는 초심을 잃지 않고 앞만 보며 열심히 뛰었고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대한민국의 중심 충북'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충북 음성이 고향인 김명규 충북도 경제부지사는 취임 2년을 앞두고 충북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고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받은 만큼 매일 충북 발전에 대해 고민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김 부지사는 취임 후 중앙부처와 국회, 기업 등을 발품을 팔아 찾아다니며 거침없는 행보에 나섰다. 오직 지역 발전을 위해 뛴다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 투자유치, 도정 현안 해결, 예산 확보 등에서 충북이 굵직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견인했다. 김 부지사는 대전~세종~청주 광역급행철도(CTX) 청주도심 통과, 오송 제3생명과학 국가산업단지 조성 추진, 청주국제공항 활성화 사업 등을 주요 성과로 꼽았다. 지난 2년 가까이를 숨 가쁘게 달려온 김 부지사로부터 그간 소회와 향후 계획 등에 대해 들어봤다. ◇2022년 9월 1일 취임한 후 2년이 다가오는데 소회는. "민선 8기 시작을 함께한 경제부지사라는 직책은 제게 매우 영광스러운 자리이면서도 풀어야 할 어려운 숙제와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