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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자

수필가

길옆 옥수수밭에는 꽃 수술 방이 성장을 멈추고 힘없이 흐느적거린다. 하루 이틀 사이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옥수수 수확은 어림도 없을 것 같다. 옥수수밭을 바라보고 있는 농민들의 마음도 옥수숫대처럼 타들어간다.

남편이 벼 포기 사이에 있는 피살이를 하고 농막으로 가자며 밀짚모자를 쓰고 논으로 향했다. 오랜 가뭄으로 논바닥은 실금이 가도록 말라 있다. 농사용 전기 스위치만 올리면 지하수가 펑펑 솟아오르는데 왜 벼를 목마르게 하는지 모르겠다. 자기도 목 좀 말라봐야 말 못 하는 벼의 고통을 알지 싶어 남편에게 갖다 주려던 생수 생각을 접었다.

논 옆으로 농가 두 채가 있다. 차를 주차하고 대문이 열린 집으로 들어가 불러도 아무런 기척이 없다. 대문 밖으로 나와 헛간 속에 있는 의자 위에 앉았다. 차 안보다 훨씬 시원했다. 해가림 천장만 있고 훤히 트여있으니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왔다. 논에 들를 때마다 헛간에 두 양주분이 더위를 피해 앉아 대화하고 계셨다.

주차된 우리 차 옆으로 흰색 자가용이 미끄러지듯 들어와 주차했다. 차 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보였다. 할머니의 아들도 운전석에서 내렸다. 아들이 뒷좌석의 차 문을 열어주는데도 할머니는 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할머니 쪽으로 걸어갔다. 할머니는 발에 깁스를 하고 계셨다. 내가 다리 한쪽을 들어드리니 그제 서야 할머니는 간신히 차 밖으로 한 발을 내디디셨다.

깁스한 발이 둔스러운 할머니는 내가 보기에도 몸이 굼떴다. 아들이 차 문을 닫아야 하니 빨리 옆으로 가시라고 성화를 했다. 남의 아들이지만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고 싶은 걸 참았다. 할머니가 땅바닥으로 쓰러지셨다. 보조 보행 기구를 앞에 두고 일으켜 세워 잡게 해드리고 대문 앞까지 보살펴 드렸다. 아들은 쓰러진 어머니는 챙기지도 않고 집에 들어가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논 쪽을 향해 남편을 쳐다보았다. 피살이가 끝났는지 장화는 씻어 논둑에 두고 얼굴 씻는 남편의 모습이 들어온다. 수건을 가져다주고 논을 바라보니 물을 대고 있다. 남편이 차 안에서 말한다. 직접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으니 옆 논이 물을 대면 물을 대고 물을 빼면 자기도 뺀다고 했다. 논을 말리는 이유는 모든 자연은 담금질이 필요하듯 벼도 담금질을 시키는 거란다.

담금질은 논에 물을 빼주면 벼 뿌리들이 물을 찾아 깊게 내리박히게 되면서 태풍이 와도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벼가 목마름을 견디고 스스로 깊게 뿌리를 내리며 살길을 찾을 수 있도록 자립심을 키워주는 것이었다.

어르신과 아들 이야기를 했다. 깁스하셨는데 아들이 살갑지 않아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어르신은 아들이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으로 논을 바라보며 담금질 이야기를 하셨다. 어르신이 농사지을 때는 벼가 익는 시기를 지켜보며 정확하게 논에 담금질을 해줬는데 자식을 키우는 일은 생각 같지 않았다고 했다. 논에 물을 대고 빼는 것처럼 아들도 때론 야단도 치며 바르게 키워야했는데 그저 귀하게만 키워 버릇이 없다고 했다. 아들을 나무라기 전에 당신이 자식을 잘못 키웠으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다고 했다.

어르신의 아들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애들을 생각했다. 나는 올망졸망한 오 남매를 두고 밤낮없이 건설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아이들이 엄마 손이 필요한 시기에도 부모 노릇을 못 하고 삶의 현장에서 헉헉거렸다. 나는 아이들한테 담금질을 해주지 못하고 살았다.

오 남매에게 엄마의 자리를 채워주지 못했지만, 다행히 아이들은 반듯하게 잘 자랐다. 늘 가뭄에 목말라 하는 작물들처럼 사랑에 목말라 했던 우리 아이들은 어른들에 대한 예의도 힘든 일도 스스로 하는 장한 아들딸로 성장했다. 남편과 나의 바쁜 일상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남매끼리 스스로 담금질을 하며 어려운 상황을 대처하는 슬기로움을 배운 것 같다.

논을 뒤로하고 다락리 농막으로 행했다. 시든 호박넝쿨 사이로 애호박이 달려있다. 얼른 애호박을 땄다. 애호박으로 가는 양분을 넝쿨에 나눠주기 위해서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해태상 위 배롱나무에 분홍색 꽃이 피었다. 행운이 오려나 하는 생각으로 기뻤다.

마당에 차를 주차하고 텃밭에 갔다. 우리 집도 가뭄을 비껴가지 못해 옥수수가 꽈배기처럼 배배 꼬여 몸통까지 돌아간다. 터질 듯이 잘 익은 토마토와 통통한 가지를 따서 가방에 넣고 오이는 오톨도톨한 것을 씻어내고 먹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쓴맛이 강하다. 오이도 가뭄에 담금질을 했나보다. 스스로 몸을 지키기 위해 자라는 것을 둔화시킨 것 같아 안쓰러웠다.

대문을 나서다가 되돌아가 오이에 물을 흠뻑 주었다. 금방 푸른빛이 감돌았다. 아들이 뉴욕으로 유학을 떠나고 한동안 나는 가뭄으로 타들어 가는 농작물처럼 몸무게가 줄어들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아들이 뉴욕에서 돌아와 석사학위를 받던 날, 나를 담금질 한 것은 내 아이들이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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