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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윤

작가

내가 사는 빌라는 산자락과 잇닿아 있어, 때로 눈앞에서 꿩이 거닐기도 한다. 창문 밖으로는 잣나무와 단풍나무가 제멋대로 도열 해 있는데, 깊어 가는 가을이면 단풍잎이 뒷마당에 노랗고 푹신한 카펫을 두툼히 깔아 놓는다.

창문을 열면 숲의 몸 내음과 마른 낙엽 냄새가 창을 넘어 깊이 흘러든다. 서늘한 날씨에도 나는 자주 창을 활짝 열어 이 정다운 풍경을 지켜보곤 한다. 적멸(寂滅)로 가는 길이 어찌 이토록 환하고 아름다운가.

곁에 이렇게 늦가을을 붙들어 놓고 커피를 볶는 시간은 그 무엇도 필요치 않을 만큼 완벽한 순간이다. 우선 환기를 위해 창을 최대한 열어놓고, 센 불로 커피콩을 달군다. 처음 커피콩의 반응은 연기다. 자신의 표피를 태우면서 몸 안의 것을 밀어내듯 연기를 뿜어낸다. 커피콩의 저항은 아직 단단한 무게감으로 나무 주걱에 그대로 느껴진다. 하얀 연기는 창문을 타고 하늘로 오르다 이내 흩어진다. 이때쯤이면 바깥의 낙엽과 커피콩이 익어가는 냄새가 어우러져 정말 진하고 향기로운 가을에 휩싸이는 기분이 된다.

'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한동안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삶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며> 中에서

학창시절 국어책에서 읽었던 이효석의'낙엽을 태우며'의 한 구절이 절로 떠오른다. 글쓴이가 낙엽을 태우는 냄새에 왜 느닷없이'맹렬한 삶의 의욕'을 느끼는지 나는 이 늦가을, 커피를 볶으며 깊이 공감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커피콩은 서서히 색이 변하기 시작한다. 콩은 둥글기에 부지런히 굴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전체적으로 고루 익기 때문이다. 잠시도 한눈을 팔 수가 없다. 10분 정도가 지나면, 껍데기가 터지면서 튀밥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때 거세게 저항하던 커피콩은 한풀 꺾이고 커피콩의 무게가 가벼워짐을 느낀다. 혹자는 수고로이 커피를 볶지 말고 이미 볶아놓은 것을 갈아 먹기만 해도 훨씬 수월하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커피를 볶는 일과 내 몸에서 느껴지는 이 직접성의 과정이 풍요롭고 행복하다.

처음 옥빛이었던 커피콩은 갈색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조금 지나면 담갈색으로 변하면서 커피의 맛이 들기 시작한다. 이때 참지 못하고 그대로 식혀 갈아서 커피를 내리면 풋내가 나고 신맛이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남아있다. 아직 땡감의 수준인 것이다. 다시 팬의 온도를 낮추면서 볶아가면, 뭉근하게 익어간다.

커피콩은 한번 껍질을 벗은 후, 다시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과정을 거친다. 아프리카 어느 고산지대에서 한낮의 햇빛과 한밤중 고독한 몸부림으로 스쳐 가는 바람을 잡고, 스며드는 이슬을 머금으며 열매를 맺어온 귀한 생명이 다른 형태로 변신하고 있다.

이제 커피는 가장 중요한 점정(點睛)의 순간을 앞두고 있다. 최적의 커피 맛은 짙은 갈색이 되면서 갈라진 틈새로 배어 나오기 시작한 기름이 나올 때다. 커피 몸 전체에서 물기가 배어 나온다. 커피콩이 마지막 고비를 넘기고, 최후에 남은 삶의 찌꺼기마저 흘려낸 마지막 정화(淨化)의 과정이었을까. 깃털처럼 가볍게 모든 것을 비워낸 후,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춘 커피로 탄생 되는 것이다. 갓 볶아 낸 커피의 향은 늦가을 대지에 풍요롭게 깔리는 낙엽 냄새처럼 깊고, 그윽하다.

시간이 지나 커피가 원하는 색(色)이 나왔으면, 뜨거운 열기를 식혀야 한다. 제 몸을 식히며 커피는 다시 단단해진다. 비워진 공간에 채워질 맛을 지키기 위해서다. 다시 하루를 기다리면 가스가 빠지고 비로소 맛을 품은 커피가 된다. 비우고 새롭게 깃든 무소유의 정령(精靈)이다.

창을 열고 짙은 낙엽 향과 더불어 마시는, 어제 볶은 한잔의 커피는 내게 생(生)의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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