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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백남규

이강년 순국 이후에도 독자부대 이끌고 의병활동
수감-재수감 등을 합쳐 23년간 신체구속 옥살이
만기 출소하고 고향에 돌아오자 아내 이미 사망
가난과 지병 끝에 1970년 사망하자 '충주시민장'

  • 웹출고시간2015.11.08 18:50:03
  • 최종수정2015.11.08 18:50:04

노년의 백남규 의병장

아들 백준기 소장

[충북일보] 백남규(白南奎, 1884~1970)는 충추 출신으로 대한제국 군인이었으며, 1907년 군대강제해산 이후 경북 순흥(順興)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한 의병장이다. 이강년 의병진에 합세하여 우선봉장·도선봉장 등으로 활약하다가 붙잡혀, 2회에 걸쳐 23년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이후 우국노인회 회장 등을 맡기도 하였지만, 김구 암살 이후 대외적인 활동을 모두 그만두고 야인으로 여생을 보냈다.

◇ 기운 센 소년이 군인을 꿈꾸다

백남규는 1884년 충주시 금가면 월상리 131번지에서 농사를 짓던 백낙성(白樂成)과 남양 홍씨의 2남 3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남수(南壽), 호는 운암(雲庵)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기록이 거의 없어 잘 알 수는 없지만, '효성이 지극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용맹한 기상의 소유자로 전쟁놀이에서는 항상 대장이 되었고, 힘이 장사라 씨름판에 나가서는 황소를 여러 번 끌고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어릴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좋았던 그는 어른이 되어서 반드시 군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지니며 성장하였다.

백남규 지사의 생가터(금가면 월상리 131번지)- 현재 이 지역에는 골프장(임페리얼레이크컨트리클럽)이 들어서 있다.

군인의 꿈을 품고 있던 그는 17세에 대한제국의 사관학교인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에 입교하였다. 입학 후 그는 무술을 익히는데 온 힘을 다하여, 맨 주먹으로 장정 10여 명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1907년 24세가 된 그는 안동진위대 부위(副尉)로 부임하였다. 하지만 평생 군인으로 살고자 했던 그의 꿈은 대한제국의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의병을 일으키다

경북 순흥(順興)에서 해산군인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킨 그는 강원도 횡성의 봉복사(鳳腹寺)에서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머물고 있던 이강년(李康秊)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이강년은 유인석과 함께 활동했던 안성해(安成海)와 포군 6명을 인솔하고 원주·횡성·강릉 등지에서 동지를 모으고 있었다. 신식 군사훈련을 받은 백남규는 유능한 군인으로서 이강년의 의병진에 합류하였고, 그와 평생 동지가 되었다. 의병진에서 우선봉(右先鋒)에 임명된 그는 이후 우선봉장과 도선봉장으로 여러 전투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907년 여름 제천 근방에 많은 의병 부대가 생겨나고 8월 5일 원주진위대 해산군인들이 의병으로 봉기하자, 제천의병이 재건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제천 일대에는 이강년·박여성·조동교 등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있었고, 8월 13일 이강년이 제천으로 들어온 이후 민긍호·조동교·오경묵·정대묵 등이 각각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제천으로 모여들었다. 이때 지휘체계를 갖추지 못한 의병부대는 원주에서 출동한 일본군 정규군 1개 소대 병력과 천남전투를 벌여 일본군 5명 사살·13명을 부상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대한제국 장교로서 의병을 일으키고, 이강년 의병진에 합류한 내용을 보도한 대한매일신보 기사(1907년 9월 29일)

8월 19일 주천에서 이강년이 대장으로 추대되고, '호좌의진(湖左義陳)'이 결성되었을 때 그는 우선봉에 임명되었다.

8월 23일 충주성 전투 이후 제천이 초토화되자 이강년 부대는 단양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호좌의진의 전투양상은 일정한 지역을 장악하고 싸웠던 전기의병과는 달리 유격전의 형태로 변하였다. 9월10일 갈평전투에서 그는 우선봉으로 남산에 배치되어 40여 명의 일본군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무찌르고 많은 물자를 노획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9월 24일에는 단양 영춘의 남천에서 이강년이 일본군과 접전하고 읍내로 쳐들어갔을 때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였지만, 적은 이미 영월쪽으로 이동하였다.

10월 6일 이강년 부대는 덕포의 독산에서 서쪽 고지에 배치되어 있는 20여 명의 영월 수비대를 만나게 되었다. 함께 싸우기로 한 병력이 모두 모이지 않자 우선봉인 백남규는 홀로 일본군이 배치된 곳으로 달려 들어가 주변 건물에 불을 질렀다. 이에 힘은 얻은 의병부대는 일본군과 9시간 동안 접전하였고, 탄환이 떨어져 물러났다. 그러나 이강년 부대와 백남규의 용맹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호좌의진의 도선봉이 되다

백남규 지사의 장례를 충주시 시민장으로 치른 후 한상욱(韓相旭) 위원장이 보낸 인사장

이 무렵 의병이 활동하는 지역에는 의병을 회유할 목적으로 선유사가 파견되었고, 이강년 등의 주요 의병장에게 글을 보내 해산을 권유하였다. 이 지역에 파견된 선유사 홍우석(洪祐晳)은 일본군 20명의 호위를 받으며 싸리재를 넘어 주천으로 이동하고자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의병진은 10월 22일 새벽 우선봉장 백남규와 우군선봉 권용일 등에게 싸리재에 매복하도록 하였다.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선유사 일행과 접전을 벌인 의병부대는 초기에 기습으로 적 5명을 사살하였으며, 전열을 정비한 일본군과 오후까지 접전하였다.

이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계속 전투를 벌이던 이강년 부대는 11월 죽령전투에서 패배하며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당분간 병사들을 쉬게 하였다. 이때 백남규는 부친이 적에게 잡혔다는 말을 듣고 잠시 귀향하였지만, 다시 돌아와 우선봉을 맡았다.

11월 25일 일본군과 정면충돌을 피하기 위해 영월에서 영춘으로 이동하던 의병진은 사방에서 적들이 몰려온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때 도선봉을 맡고 있던 백남규는 2초(20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남천에서 적을 방비하였다. 의병진은 다음날 대구에서 출동한 일본군 제14연대와 전투를 벌였으나 참담한 패배를 당하였다.

1907년 12월 중순 이후 의병진은 탄환 부족과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이강년의 본진이 단양 복상골전투에서 패하면서 많은 병사들이 체포되거나 전사하며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고, 가평 화학산 일대로 이동하였다. 이는 이인영 의병진의 서울진공작전에 합류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이때 백남규는 본진과 함께 이동하지 않고 남아 있으면서, 영남과 호서 사이에서 병력을 모았다.

1908년 봄 그는 가평 일대에서 겨울을 보내고 제천 일대로 이동하던 본진과 영월 상동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후 이강년 의병진은 권용일·김상태·변학기·성익현·정경태·정연철 등의 의병장과 함께 안동의 서벽·봉화의 내성·안동의 재산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1908년 7월 2일 이강년 의병장이 작성산 전투에서 상처를 입고 체포된 후 10월 13일 교수형을 당하게 되자, 호좌의진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백남규는 독자적으로 구성된 의병부대(5초, 60명)를 거느리며, 마지막까지 의병활동을 지속하였다.

◇ 23년간 옥고와 어려운 말년

백남규 지사 포함 13인의 애국지사 묘소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이장하는 내용을 보도한 경향신문 기사(1970년 11월 17일)

백남규는 1908년 12월 충주헌병에게 체포를 당한 후, 공주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받았다. 이후 8년간 옥고를 치루고 출옥한 그는 단양일대에서 재기를 시도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1917년에는 중국 상하이(上海)로의 망명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음성 개화실에서 다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무기형으로 감형되었고, 다시 15년간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안타깝게도 아내와 한 점 혈육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가 만기 출소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일가친척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고, 도움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이후 그는 재혼을 하고,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광복 직후 그는 이승만(李承晩)이 사람을 보내 정권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이는 그가 단독정부 수립 노선을 따르지 않았고, 김구(金九)와 뜻을 같이하였기 때문이다. 해방된 조국의 발전을 위해 그는 우국노인회 회장·국민회 고문 등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구가 암살된 이후 그는 공적인 활동을 모두 그만두고 평생 야인으로 지냈다.

6·25전쟁 때는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충주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가 그를 알아본 지휘관에 의해 풀려나기도 했고, 충주경찰서장에 의해 민간 치안대장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옛 동지 권용일 의병장을 다시 만나, 서로 충주와 제천을 오가며 친형제 이상으로 지냈다. 두 의병장의 돈독한 우정은 그들의 자녀인 백준기와 권재선까지 이어졌다.

1970년 11월 17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101호에 안장된 백남규 지사의 묘소

권 의병장의 며느리인 박순란은 '어른(백남규)이 자주 충주에서 100리 길을 걸어와 10일 이상 머물 때가 많았고, 두 분이 매일 의병 얘기로 밤을 지새웠다'고 회상하였다. 이때 백남규는 일본군 귀 2백여 개를 줄로 꿰어 말안장에 걸고서 개선한 이야기를, 권용일은 배양산(培陽山, 일명 배향산)에서 무기와 탄약을 옮겨오던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았다고 한다.

일정한 직업도 없고 모아둔 재산도 없었던 그는 항상 끼니를 잇기도 어려웠다. 특히 하나뿐인 아들은 우여곡절 끝에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였고, 서당에서 한문을 조금 배운 것이 교육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독립운동가의 자손으로 긍지를 잃지 않고, '항상 배운대로 실천하라'는 부친의 유언을 가슴깊이 새기며 정직하게 살고 있다.

백남규는 이러한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1963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그는 지병으로 몇 년간 고생하다가, 1970년 사거하였다. 충주시에서는 한평생 나라의 독립을 위해 외롭고 고단했던 삶을 살았던 그의 장례식을 충주시민장으로 거행하였다. 그의 유골은 충주의 절에 모셔졌다가, 1970년 11월 17일 순국선열 12명의 유해와 함께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

/ 조성진(독립기념관 연구원, 충북대학교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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