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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최성천

경북 일원에서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펼친 의병장
충주 '신기리'에서 출생… 정확한 주소지는 불명
군자·군수품 모집위해 소백산맥 넘나들며 활약
1910년 강도·살인 혐의…교수형으로 생애 마감
그의 묘소는 물론 후손들도 현재까지 확인 안돼

  • 웹출고시간2015.11.29 15:25:48
  • 최종수정2015.11.29 15:25:47
[충북일보] 최성천(崔聖天, 1884~1910)은 충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김상태(金尙台) 의병장의 휘하 장수로 알려져 있는 의병장이다. 그는 1910년에 소백산맥 이남의 산간지대에 근거지를 두고 20명 내외의 소규모 병력을 지휘하며 안동·예천·영주 등지에서 군자금 및 군수품을 모집하고 의병을 모으는 등 활발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베일에 가려진 의병장

최성천에 대해 알려진 것은 전무한 편
이다. 다만 일제의 기밀문서에 의거해서 1884년생일 것으로 추정하고, 재판 판결문 기록을 통해 광부 출신으로서 충주 신기리(新基里)에 살았다는 정도의 사실만 확인되는 정도이다. 그러나 판결문에도 그가 살았던 충주 신기리가 어느 면에 속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충주 일원에는 일제강점기 때나 지금이나 신기리라는 지명은 없었다. 다만 현재 충주와 인접해 있는 괴산군 괴산읍과 문광면에 신기리가 있는 것이 확인되는 바, 이 신기리를 충주 신기리로 표기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그가 서울 시해동(柴楷洞) 출신이라는 기록과 강원도 영월 하동면 직실리(稷實里) 출신이라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는 일제가 세간에 전해지는 이야기를 수집하여 기록한 것으로 확실한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 최성천의 판결문에 기재된 주소인 충주를 정확한 주소로 봐야 할 것이다.

국가보훈처에 의하면 후손의 존재 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 일제는 최성천이 그의 형에게 처자를 맡기고 의병항쟁에 투신한 것으로 기록하였는데 그 후손이 현재 어디에 뿌리를 내렸는지 확인이 되지 않는 상태인 것이다. 게다가 그의 묘소 역시 확인되지 않는다. 그의 후손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으며, 어디에 묻혀 있는지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의병장인 것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한 의병장

최성천이 함께 활동한 의병장 김상태.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의병투쟁이 들끓자 일제는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대대적인 의병 탄압에 나섰다. 이에 대부분의 의병들은 국내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상실하였음을 깨닫고 만주와 연해주 지방으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하였다. 한편, 국내 의병투쟁은 일제의 대규모 탄압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하며 산간지대를 근거지로 유격전을 펼쳐 나갔다. 김상태 의병장은 1908년에 이강년(李康秊)이 순국한 뒤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각처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이에 따라 경상북도에서는 김상태 휘하 의병장 최성천·윤국범(尹國範) 등이 10~20명의 부하를 이끌고 안동·예천·영주·순흥·풍기·봉화와 강원도 영월 등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최성천 부대는 1909년 12월부터 의병투쟁을 개시하였다. 일제 기록에는 그가 이끄는 의병부대가 1909년 12월 22일 평창 미탄면에 도착하여 면장 박성현을 결박하고 군자금으로 55원 30전을 빼앗았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 최성천 의병부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며, 이 때 그의 부대는 5연발총 2정, 단발총 8정, 총검 2자루, 군도(軍刀) 1자루 등의 무기를 휴대하였다고 한다.

1910년 3월말 이후 그가 이끄는 의병은 가히 신출귀몰한 의병투쟁을 전개하며 군자금 및 군수품 모집을 벌였다. 1910년 3월 24일에는 안동 풍천면 가곡리에 있는 엄금용의 집에 이르러 엽전 605량, 백목포(白木布) 38척을 빼앗았고 3월 25일에는 의성 신평면 신방(新坊)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다음날인 3월 26일에는 일본 헌병대에 발각되어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는데, 의병들은 응전을 하며 예천 용궁면 월곡(月谷) 방향으로 퇴각하였고 같은 날 오후 5시경에 예천 호명면 오천(梧川)시장 주막에 나타나 일본 헌병과 재차 전투를 벌였다. 3월 27일에는 일본 헌병과 접전한 뒤 안동 풍산읍 소산리 북쪽으로 퇴각하였고 그날 오후 5시경 안동 풍산읍 서미리에 나타나 일본 헌병과 재차 전투를 벌였다.

최성천 부대는 1910년 4월 27일 영주 신덕면(新德面)에 도착하였다. 이에 일본은 경찰대·헌병대·수비대 등을 파견하여 포위하였으나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이후에도 일제는 최성천 부대가 예천 북쪽 30리 지점에 모여 있다는 정보를 얻고 순사 5명을 급파하기도 했으나 이미 그의 부대는 사라진 뒤였다.

1910년 5월 24일, 최성천은 김상태와 함께 130명의 의병부대를 인솔하고 학가산 산중에 근거지를 두고 주둔하였다. 그리고 4~5명으로 1개조를 조직하여 안동·영주·예천·봉화의 장시와 부호의 집을 정탐해 두었다. 최성천은 5~6명의 부하를 이끌고 예천 감천면 미석리와 영주 문수면 대양리를 왕래하였는데 이에 일제는 1910년 5월 26일 예천수비대를 파견하여 그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1910년 5월 31일에도 20명의 부하를 이끌고 안동 북후면 옹천리에 있는 강동수의 집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으고 식사를 해결한 뒤 영주로 향하였다.

1910년 7월 이후에도 그는 20명 내외의 부하를 이끌고 각지를 다니며 군자금 및 군수품을 모집하였다. 7월 12일에는 예천 호명면 본리에 도착하여 마을 주민들로부터 미곡 4석, 닭 8마리를 거둬들인 뒤 같은 날 오후 7시경에 사라졌다. 7월 13일에는 안동 풍산읍 수곡리에서 휴식한 후 풍산읍 노리에 있는 김형동의 집에 도착하여 60원을 걷었다. 7월 14일에는 낙동강을 건너 안동 풍천면 병산리에 이르렀고 이에 일제는 풍천면 인금리에 도착하여 진을 쳤으나 이미 산속으로 퇴각한 뒤였다.

◇최성천 부대의 협동학교 습격

최성천 부대의 협동학교 습격을 애도하는 논설 기사(황성신문, 1910. 7. 23).

1910년 7월 18일, 최성천 부대가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습격한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 이는 의병부대가 계몽운동에 가졌던 적대감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었다. 그리고 국권회복의 방법에 대한 관점의 차이에서 생긴 비극이었다. 당시 협동학교는 경상도 계몽운동의 선구라고 할 수 있었다. 국민정신을 강조하는 구국교육을 실천하였는데 이러한 신교육운동의 전개는 보수 유림이나 의병의 직접적인 반발을 야기하였다. 결국 최성천 부대는 협동학교의 교감 김기수(金箕壽), 교사 안상덕(安商德)을 총으로 쏴 죽이고 말았다.

최성천의 대구공소원 판결문(1910. 11. 12).

1910년 7월 29일, 최성천은 결국 일경에게 붙잡혀 영주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그는 1910년 9월 21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강도·강도살인·강도상인(傷人)·모살(謀殺)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았고, 1910년 11월 12일 대구공소원에서 고살(故殺)·강도·강도살인 혐의로 교수형이 확정되었다. 예천 호명면 오천(梧川)시장에서 야마우치(山內銀三·)를 살해하고 봉화 물야면 개단리에서 일제의 밀정 권흑이(權黑伊)를 살해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야마우치는 일반 상인이라고 하였으나 엽총을 휴대했던 것으로 보아 단순한 상인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권흑이는 일본 수비대의 밀정으로 1909년 8월 25일 최성천을 곤경에 빠지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결국 1910년 12월 8일 대구감옥에서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그는 항상 칼을 차고 있었고 주로 흑색 혹은 백색의 한복을 입었으나 때에 따라 일본식의 신사복을 입고 정탐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한명만(韓明萬)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일제 기밀문서에 의하면 의병장 한용수(韓龍守)가 1910년 3월 23일 순흥주재소 순사에게 체포되자 한용수의 뒤를 잇고자 스스로 한명만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한명만은 5척 5촌(약 165cm)의 키에 피부가 하얗고 호남형으로 충청도 사투리를 썼다고 한다.

그는 의병투쟁을 통해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을 모집하여 의병전쟁을 준비하였다. 그의 차장인 권익승은 안동진위대 병졸 출신으로 교련장을 맡아 집총교육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부하 중에는 대장장이가 있어 무기 수선을 담당하였고, 총대장 김상태가 있는 강원도 영월 칠령산에는 탄약 제조공이 있어 탄약 제조를 담당하였다고 한다.

최성천 부대가 습격한 협동학교로 사용된 가산서당(안동시 경북독립운동기념관내 이전 복원).

그는 안동·예천·영주의 경계에 있는 학가산과 주마산에 근거지를 두고 일제를 상대로 유격전을 펼쳤다. 5연발총·단발총·촌전총(村田銃)·화승총·30년식 보병총·엽총 등 다양한 무기를 휴대한 20명 내외의 부하를 이끌고 안동·예천·영주 등지에서 일제와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이는 1,000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항일의병전쟁을 치르기 위한 고군분투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의병투쟁의 공훈을 기리고자 1995년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후손을 찾을 수 없는 의병장

최성천 등 충주 출신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세운 독립유공자공적비(충주 중앙탑공원).

국가보훈처에서는 해마다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찾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의 업적을 인정받아 유공자로 지정되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는 후손을 찾을 수 없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2015년 11월 기준으로 독립유공자 14,264명 가운데 5,201명이 후손을 찾지 못한 상태이다. 최성천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독립장에 추서되었음에도 후손과 연락이 되지 않아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더불어 그의 묘소도 파악이 되지 않아 국립현충원에 모시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안타까운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후손을 찾는 것이 시급하다. 최성천을 포함한 많은 독립유공자들이 하루빨리 그들의 후손을 찾고, 민족사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 김호진(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선임연구원,충북대학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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