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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이형우

본명 '이춘우'…이현·이흥준 이름으로도 활동
1919년 국내 잠입…백두산 인근 근거지 마련
1921년 3년·1927년 7년 등 두차례 10년 옥고
출옥 후 어떻게 살았는지 베일… 70세로 영면

  • 웹출고시간2015.09.06 17:49:17
  • 최종수정2015.09.06 17:49:11
[충북일보] 이형우(李亨雨 1889∼1958)는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충북 출신 독립운동가다. 그는 1919년 이범윤이 조직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 왕칭현(汪淸縣) 분단에 가입하여, 이듬 해 백두산 주변을 근거지로 일제의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다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각지를 돌며 군자금 모금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함경북도 영흥(현 금남군)에서 피체되어 또 다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북간도 왕칭현으로 망명하다

이형우의 묘(대전현충원 애지제1-18) 묘지석에도 그의 이력이 잘못 기재되어 있다.

이형우의 본명은 이춘우(李春雨)로 알려져 있다. 그는 광복단 활동 당시 이형우, 이현(李玄), 이흥준(李興俊) 등의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일제강점기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신분이나 본명을 숨기고 이명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문에 동일인인지 알 수 없어 독립운동의 행적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안타까운 경우가 적지 않다. 이형우 역시 법원 판결문의 기록 이외에는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그가 만주의 광복단에 가입하여 그 조직의 일원으로서 철저하게 무장독립투쟁을 실천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스무 살 남짓인 1908년 경, 북간도로 망명하여 왕칭현 대감자(大坎子)에 정착하였다. 그가 만주로 망명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1910년을 전후하여 만주나 연해주로 망명한 사람들 중에는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한 사람들이 많았다.

◇ 조국독립을 위해 대한광복단에 가입하다

이형우는 1919년 10월경 자신이 살던 왕칭현에 광복단이 조직되자, 그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전성륜(全聖倫)의 권유로 가입하였다고 한다. 그가 광복단에 가입한 이유는 광복단의 취지가 '조선 독립'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정의단(正義團)이 광복단과 군정서의 두 파로 분리된 후 이범윤이 광복단장이 되자, 그 때부터 광복단에 가입하여 의사원(議事員)이 되었다'고 말하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형우가 가입한 왕칭현의 광복단은 원래 대한정의단 소속이었던 김성극, 전성륜 등이 기존의 정의단을 나와 1919년 9월경 공교회원들을 중심으로 새로 결성한 단체였다.

 만주는 지리적인 인접성 때문에 19세기 중반부터 상당수의 한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하여 1910년경에는 이미 거대한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이러한 인적·물적 자원을 토대로 만주 일원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서간도·북간도, 연해주까지 학교나 단체를 조직해나가면서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국내외에 거세게 일어나자, 그 영향으로 만주와 연해주에도 수많은 독립운동단체가 결성되었다. 당시 북간도 지역에 존재한 항일무장단체만 해도 30여개가 넘을 지경이었다. 이것은 지역·사상·종교 등 모든 조건을 초월하여 조국독립을 위한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을 조직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념이나 종교 등의 차이로 단체 간의 주도권 분쟁이 항일투쟁의 역량을 약화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서로 연대하여 봉오동승첩, 청산리대첩과 같은 혁혁한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범윤은 1919년 3·1운동 직후 의병세력을 규합하여 연해주 수이푼에서 대한광복단을 조직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국내진공을 위해 안도·장백현 일대에 무장세력을 기반으로 백산주국(白山柱局) 대한광복단을 조직하며 단세를 확장하였다. 이듬해인 1920년 봄에는 왕칭현의 광복단도 이범윤의 대한광복단에 통합되어 왕칭현 분단으로 편성되었다.

 대한광복단은 흔히 1915년 대구에서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연대하여 결성한 광복회(光復會)와 자주 혼동되기도 한다. 박상진이 주축이 되어 1915년 국내에서 결성된 비밀결사단체인 광복회와 이범윤이 1919년 만주지역에서 조직한 대한광복단은 전혀 별개의 다른 단체이다.

◇ 대한광복단의 통신원에서 군자금 모금까지

독립군들이 사용한 무기

이형우는 대한광복단의 행정을 맡는 한편,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후일 교관으로서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뿐 아니라 동지 이병섭(李炳燮)과 함께 통신원으로 본부와 각지 지단과 분단 사이의 연락사무도 담당하였다. 당시 대한광복단은 군자금을 모아 대규모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1920년 3월경 중대장이었던 조동식과 함께 독립군 약 100여 명을 인솔하여 연해주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로 가서 총기 100자루, 권총 2∼30자루와 탄환 등을 구입하였다. 8월에는 전성륜의 지시로 허룽현(和龍縣) 일대에서 군자금 약 3천원을 모아 오기도 하였다. 군자금은 대부분 무장투쟁을 위한 무기구매 대금으로 쓰였던 만큼 군자금 모금활동은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철혈광복단의 의거 현장을 알리는 '15만원 탈취기념비'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맞서 무장투쟁을 벌일 만큼 강력해진 이유 중 하나는 연해주에서 신무기 대량 구입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일과 손을 잡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식민지였던 체코 청년들을 징집하여 러시아 전선으로 보냈다. 그러나 체코인들은 같은 슬라브 민족이었던 러시아와의 싸움을 피하기 위해 항복하거나 탈영하였다. 러시아는 이러한 체코인 포로들을 중심으로 체코군단을 만들었는데, 이 체코군단이 러시아혁명과 내전에 휩쓸리다가 우여곡절 끝에 연해주를 경유해 본국으로 귀향하게 되었다. 1920년을 전후한 시점에는 6만이 넘는 체코군단이 무장한 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귀향을 준비하고 있었다. 독립군들은 곧 떠나갈 이들과 무기구매 협상을 벌였고 체코군단의 신무기를 구입한 독립군들은 무장투쟁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예컨대 1920년 1월 철혈광복단이 국내 회령으로부터 북간도 룽징(龍井)으로 현금을 수송하던 조선총독부의 수송마차를 습격하고 현금을 탈취해 북간도 일대가 발칵 뒤집힌 일이 발생한 바 있다. 이른바, "15만원 탈취사건"인데, 이 역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의 무기를 구입하기 위한 무장투쟁이었다.

◇ 국내진공을 위한 무장투쟁을 전개하다
 1919년 이후 일제가 북간도 지역의 독립군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진행하자,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은 상당한 곤란에 봉착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간도참변과 자유시참변으로 북간도와 러시아의 독립운동 조직이 파괴되고 수많은 독립군들이 희생되었다. 양대 참변에서 살아남은 독립운동 단체들은 서로 연합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시도하였다. 허룽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형우는 50여명의 동지들과 국내로 잠입하여 백두산 등 산악지대에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그들은 일제의 경찰서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으로는 인근 지역의 청년 계몽운동 및 한인 교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일도 병행하였다.

 1921년, 이형우는 군자금 모금과 단원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일제는 이듬해에 경성복심법원에서 그에게 3년의 중형을 선고하였다. 그가 무기대량 구입에 참가한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군자금 모금, 통신원 활동, 무기구입, 무장투쟁 등 이형우의 활동에 비해 징역 1년의 원심이 가볍다고 파기하고 징역 3년형을 선고하였던 것이다.

◇ 조국을 되찾는 것이 강도죄라니

이형우 체포기사(매일신보, 1927년 6월 4일자). 그는 이 사건으로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25년 7월 출옥한 이형우는 곧바로 전국 각처를 돌아다니며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7년 함경남도 영흥에서 다시 붙잡혔다. 당시 그가 소지하고 있었던 것은 선포문 5장과 브라우닝식 권총 1자루와 탄환 등이었다. 경성복심법원은 그에게 7년형을 선고하였는데 당시 그의 죄명은 '강도' 및 '강도미수'죄였다.

그해 5월 이형우는 단원 두 명과 더불어 영흥군의 부호들 집을 찾아가 자신들을 상해임시정부원으로 소개하고 군자금을 요구하였다. 한 부호가 현금 15원밖에 없다고 하자, 그는 입단서에 가입 서명을 받고는 후일 군자금을 제공할 것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이 사실을 탐지한 영흥경찰서는 일본군과 합동으로 영흥 일대를 샅샅이 수색하여 5월 28일 영흥읍에 은거해있던 그를 검거하였다. 그는 강도죄 등 여러 개의 중복 죄명으로 중형을 선고받았는데, 일제는 적당한 법적용이 어렵거나 중형을 언도하고자 할 때에는 형법상의 다양한 죄명을 덧붙였다. 일제강점기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살인, 강도, 사기, 절도 등과 같은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먼 '파렴치한' 죄명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형우 역시 독립운동이 강도의 행각이 되어 또 다시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러야했다.

◇ 사진 한 장 남겨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이형우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1년 11월 30일). 본적은 충북 진천, 본명은 이춘우로 되어있다.

이형우는 독립운동으로 인한 두 번의 옥고, 도합 10년 가까운 긴 수형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나 성장 배경 등에 관하여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의 모습을 추정해 볼 사진도 없다. 본적조차 충청북도인지 강원도인지 명확하지 않다. 처음 이형우의 피체소식을 보도한 1921년 ≪동아일보≫기사(1921년 11월 6일자)에는 그의 본적을 충북 제천으로 보도하였다. 그러나 1921년 법원 판결문에는 본적이 충청북도 진천군으로, 1927년의 판결문에는 강원도 영월군으로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1934년 다시 출옥한 후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알 수 없다. 이형우는 1958년 서울에서 70세의 나이로 영면하여 현재에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안장되어 있다.

/ 김건실(영동대 강사·충북대학교 사학과 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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