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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권병덕

영원한 천도교 지킴이, 3·1운동 민족대표 권병덕
어려서 상주 이주…9세때 미원 용곡으로 다시 귀향
1896년 충주 외서촌서 최시형 만나 교세 회복 하명
출옥 소감 "옥중에서 동포만나면 무조건 반가웠다"
현재 후손 전화번호 결번…생가 위치도 확인 안돼

  • 웹출고시간2015.03.29 15:23:05
  • 최종수정2015.03.29 15:22:21
권병덕(權秉悳, 1868~1944)은 충북 청주 출신으로 3·1운동 때 천도교 도사로서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동학 입도와 동학농민운동 참여를 계기로 민족운동에 참여하였고, 1907년에는 시천교에 가입하였다가 1916년 천도교로 귀의하였다. 이후 손병희를 보좌하며 천도교의 주요 직책을 수행하였고, 3·1운동 이후에도 천도교의 민족운동을 주도한 영원한 천도교 지킴이였다.

◇청주에서 태어나다

권병덕

권병덕은 1868년 당시 청주군 미원면 성화동(현재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종암리)에서 부친 권문영(權文永)과 고령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윤좌(潤佐)이며, 호는 청암(淸菴)·정암(貞菴)·우운(又雲)을 사용하였다. 그의 선대는 경북에서 살았는데, 문경 호계면에 증조부모와 조모의 묘소가 있고, 조부의 묘소는 상주 화서에 있다.

그가 청주에서 태어난 것은 모친 신문화(申文嬅)가 청주 일원에 세거하던 고령 신씨의 후예로서, 외가에서 출생하던 관례 때문으로 이해된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선대의 고향인 경북 상주로 이사하였다. 당시 한 신문이 그를 상주 출생이라고 잘못 보도한 것은 이 때문이다.

상주에서 그는 종숙으로부터 《동몽선습》을 배우다가, 9세 때인 1876년 다시 청주 양곡리로 이사하였다. 양곡리(양골)는 지금의 미원면 용곡리인데, 이곳은 그의 외가로서 현재도 고령 신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외가 형 신철모와 인근에 사는 유학자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다. 16세 때인 1883년에는 원주에 사는 원세화의 장녀와 혼인하였다.

◇동학에 입도하고 2차 봉기를 주도하다

18세인 1885년, 그는 자신에게 한학을 가르치고 있던 임약호(任弱鎬)로부터 동학 입도를 권유받고 입도하였다. 이듬해 봄, 그는 상주군 화서면에 있던 최시형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이 때 최시형은 수도 정진하는 방법을 일일이 설명해 주며, 영부(靈符, 동학의 부적)를 친히 써주었다. 이후 그는 밤낮으로 동학의 경전 연구와 주문 외기에 몰입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잠시 누워 있는데, 갑자기 집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놀라 일어나 보니 분명히 그의 집에 불이 난 것이었다. 이 때 그는 집안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천사(天師)에게 고하니 불이 스스로 사그라졌다고 한다. 동학에 입교한 그가 처음으로 경험한 신비한 일이었다.

권병덕은 20세이던 1887년, 부친의 명에 따라 과거에 응시했다. 그러나 급제하지는 못하였던 듯하다. 이해 그는 최시형의 명을 받아 자신의 집에서 49일 기도식을 거행하였고, 보은 장내리에 동학의 중앙본부 역할을 한 육임소(六任所)가 설치될 때 중정(中正)의 중책을 맡았다.

동학혁명 발발 1년 전인 1893년, 최시형이 그의 미원 용곡리 집에 머물며 복합 상소를 준비하였다. 교주가 그의 집에 머물며 동학의 주요 사항을 결정하고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일시나마 그의 집은 동학의 본부 역할을 한 셈이다. 드디어 1894년 동학혁명이 발발하였다. 교주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동학(북접)은 전라도 동학(남접)과 달리 무장봉기에 반대하여 처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접도 남접에 호응하여 공동전선을 펼치기 위해 봉기하여 청산에 집결하였다. 권병덕은 김연국(金演局), 황하일(黃河一)과 보은의 대표로서 동참하였다. 이 때 그는 최시형의 명을 받아 각지의 교도들이 기포케 하였는데, 자신은 충경포(忠慶包) 차접주(次接主)로서 충경포와 문청포(文淸包) 교도 3만여 명을 인솔하였다.

그는 관군과 수차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전투에 패배하고 피신하던 중, 영동과 논산에서 관군과 맞닥뜨려 검문을 받는 위기의 순간을 넘기기도 하였다. 1896년, 그는 충주 외서촌으로 옮겨온 최시형을 만났는데, 이 때 최시형이 그에게 경상도 일대를 순회하며 교세를 회복하도록 지시하였다. 요컨대 동학혁명을 전후한 시기, 권병덕은 최시형의 측근으로서 교단의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시천교의 중심인물이 되다
1907년 이용구 등이 시천교를 창건하였다. 손병희가 친일화한 일진회 간부를 축출한 데 따른 반발이었다. 이때 천도교 보수파인 김연국이 시천교로 이적하여 교주에 추대되었다. 권병덕도 시천교로 옮겨 육임 중 교수(敎授)에 올랐다. 시천교는 최제우와 최시형의 신원운동을 전개하며 천도교와 종통(宗統) 투쟁을 벌였다.

시천교는 1911년의 임원 개선에서 이용구계가 육임의 자리를 차지하며 교권을 장악했는데, 그는 교화를 담당하는 관도사(觀道師)로 밀려났다. 이듬해, 시천교가 교역자 양성을 위한 종학관(宗學館)을 건립하였는데 그는 교사로서 활동하였다. 권병덕은 《시천교월보》에 〈시천역사〉를 기고하고, 시천교 경전인 《시의경교(時儀經敎)》를 펴내는 등 교리에 정통하였다. 1912년 초의 임원 개선에서 그는 요직인 종무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913년 초, 권병덕은 간부직을 사임하고 낙향해 버렸다. 송병준의 교권 장악과 독단적 운영에 반발한 때문이다. 결국 이해 3월, 김연국계가 시천교총부를 설립하여 시천교본부와 결별하였다. 물론 친일적 성향이 농후하였던 것은 두 단체가 유사하다.

김연국 계열이었던 권병덕은 1915년 중앙시천교회본부를 개교하며 독자 노선을 걸었다. 이제 권병덕은 천종사장(天宗師長)으로서 시천교 한 지파의 수장이 된 것이다. 이 단체 또한 친일적 성향을 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해 일본으로 건너가 대정(大正)의 즉위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1916년 참회식을 거친 후 천도교로 다시 귀의하였다.

◇천도교 도사로서 민족대표에 참여하다

청주 3.1공원에 조성된 권병덕 동상

천도교 귀의 후, 권병덕은 주요 직책을 수행하며 손병희의 집사에 해당하는 승례(承禮, 일명 接待係)로 있었다. 그러던 1919년 2월 20일경, 그는 손병희로부터 독립운동 계획을 전해 들었다. 손병희는 그에게 민족대표로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손병희는 권병덕에게 참여를 권유했는지 여부를 추궁하는 일제의 신문에 답하며, 권병덕을 '내 육신과 같이 지내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다. 권병덕은 그만큼 손병희와 종교적으로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교감을 나누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1910년 경술국치 당시, 권병덕은 친일적인 시천교의 주요 인물이었기 때문에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을 반대하지는 않았었다. 이 사실은 일제의 신문에 대한 그의 답변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천도교로 귀의한 뒤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반대하고 독립을 희망하였다.

권병덕에게 3·1운동에 민족대표로 동참하여 서명하라는 손병희의 권유는 거역할 수 없는 명령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손병희의 권유에 지체 없이 참여하였다. 물론 그 또한 독립을 위해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는 3·1운동으로 피체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판사에게 처벌을 각오하고 있었다고 말하며, 기회가 있으면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피력하였다.

권병덕은 2월 26일 김상규의 집에서 열린 천도교측 대표 모임과, 28일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전체 민족대표의 최종 회합에 참여하며 동지들과 결의를 다졌다. 1919년 3월 1일 오후 1시 반, 그는 손병희와 함께 태화관으로 나갔다. 드디어 오후 2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고, 그는 다른 민족대표들과 함께 일제에 연행되어,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3.1운동으로 수감된 권병덕의 수형카드(서대문형무소)

출옥하던 날, 그는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강도나 절도로 들어온 사람이라도 우리 동포는 반가웠다"라고 하며, "옥중에서 얻은 교훈은 동포끼리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잊힌 독립운동가

출옥하는 민족대표들(앞줄 맨 오른쪽이 권병덕. )

출옥 후 그가 동학에서 파생한 지류인 수운교와 상제교로 옮겼고, 서대문에서 한약방을 경영하고 있다는 신문보도가 있으나, 정확한 사실은 파악할 수 없다. 권병덕은 종리원(宗理院)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審計院長), 감사원장, 선도사(宜道師) 등을 지내며 천도교의 중심적 위치를 계속 지켜나갔다.

권병덕의 출옥 후 동향기사(동아일보 1925. 10. 7)

그런데 그에 대해서는 많은 사실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후손관계조차 파악되지 않는다.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되어 있는 후손의 전화번호는 모두 결번이다. 연금수급이 끝났기 때문에 후손 관리가 되지 않고 있다. 어렵게 전화로 연결된 한 후손은 독일에 거주하고 있었다. 천도교중앙총부에서도 그의 행적이나 자료 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의 생가지 위치도 제대로 확인되어 있지 않다. 그의 출생지와 관련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것도 이 지면이 처음이다.

권병덕이 저술한 이조전란사(1935, 전쟁기념관 소장)

그의 활동에서 잊힌 또 하나의 사실은 역사가로서의 면모이다. 그는 《조선총사(朝鮮總史)》·《이조전란사(李朝戰亂史)》·《궁중비사(宮中秘史)》 등의 역사저술을 남겼다. 특히 《조선총사》는 일제 침략에 항거한 의열사의 활약을 높이 평가하여 독립운동을 부추겼다는 혐의로 이른바 출판법의 '안녕 금지' 조치에 의해 삭제 처분을 당한 역사서이다. 따라서 그의 역사저술은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역사학의 관점에서 논의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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