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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김상태

한말 의병전쟁의 불사조, '양백대장군'
유교적 지식인이면서 동학 평등사상 크게 공감
돈에 눈멀은 심복이 밀고… 경북 순흥에서 피체
옥중에서 음식 거부하자 일제 강제로 투입 시도
단식 13일만에 순절 이강년 옆에 묻어달라 유언

  • 웹출고시간2015.05.31 15:10:13
  • 최종수정2015.05.31 15:11:28

피체된 김상태.

김상태(1862~1911)는 1896년 전기의병에 참여한 이래 후기의병을 거쳐 경술국치 이후인 1911년까지 항쟁을 지속한 불굴의 투사이다. 그는 소백산과 태백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양백대장군(兩白大將軍)'으로 불렸던 불사조의 신화와 같은 인물이다. 한말에 수많은 의병이 있었으나, 전기부터 후기까지 전 과정을 참여한 의병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그의 의병항쟁은 구한말 의병을 실체적으로 실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동학사상의 영향을 받다

김상태는 1862년 충북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당시는 영춘군 남천리)에서 아버지 김규병과 어머니 정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삼척이고, 본명은 상호(相鎬)인데, 자(字)로 사용했던 상태(尙台)로 더 널리 알려졌다.

그는 어릴 때 영춘을 떠나 삼척 김씨들의 본향인 강원도 영월의 옥동마을로 이주하였다. 김상태는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한학을 공부하였는데, 실력이 출중하여 마을에 서당을 열어 학동을 지도하는 한편, 향교의 직임을 맡기도 하였다.

그의 사상 형성에는 동학사상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옥동마을은 동학의 교주였던 최시형이 일시 숨어 지내며 포교활동을 하던 곳 중의 하나다. 따라서 옥동마을은 일찍부터 동학 조직이 형성되어 있었고, 김상태도 어려서부터 동학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그는 곧 동학사상에 공감하였고, 동학농민운동 때에는 지휘관으로서 관병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김상태는 향촌지역의 유교적 지식인, 다른 한편으로는 동학의 평등사상과 저항정신을 가슴에 품은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의 기상은 외형에서도 드러났다. 그를 본 사람들은 "그 외형은 얼굴은 검붉었고, 광대뼈가 높고, 수염은 붉은 기운을 띠었으며, 눈빛은 쏘아 보는 듯한 위엄이 있었다."라고 표현하였다.

전기의병 때 호좌의진에 참여

1895년 여름에 왕비가 시해되고 연말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에서 의병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인 1896년, 이강년이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김상태는 칼을 들고 그를 찾아갔다. 김상태를 만난 이강년은 곧 의형제를 맺고 그를 중군장으로 임명하였다. 이강년부대는 안동관찰사의 목을 베며 기세를 올렸는데, 김상태도 여기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가 속한 의병부대는 석성현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김상태와 이강년은 새로운 활로를 찾아 호좌의진으로 합류하였다.

호좌의진의 남산전투지. (충북 제천시 화산동 제천교육지원청 뒷산)

호좌의진의 남산전투지. (충북 제천시 화산동 제천교육지원청 뒷산)
호좌의진은 제천을 중심으로 유인석 등 화서학파 문인들이 출범시킨 의병부대였다. 그들이 합류해 오자, 유인석은 이강년을 유격장으로 임명하여 영남지방에 나갔던 서상렬 부대와 호응하면서 조령 등지의 작전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호좌의진은 한때 10개 고을을 장악하고 영남지역 의병과 연합하여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과 관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1896년 5월 남산전투를 계기로 근거지인 제천지역을 상실하고 말았다. 호좌의진의 주력부대는 할 수 없이 서북지역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갔다. 유인석의 북행에 동참하지 않았던 이강년부대는 해산되었고, 김상태는 다시 옥동마을로 돌아와 몸을 숨겼다. 이듬해인 1897년 봄, 김상태는 이강년과 함께 요동으로 유인석을 찾아가 함께 망명생활을 하면서 백두산 주변과 무송, 임강 등지에서 3년간 의병활동을 했다.

이후 귀국한 이강년과 김상태는 은둔하면서 재기의 날을 기다렸다. 김상태는 고향에서 서당을 열고 학동들을 가르치며, 제천 지역에 있는 진주 강씨의 서재인 박약재(博約齋)에도 출입하여 4군(제천, 청풍, 단양, 영춘)의 의병론자들과 교유하며 때를 기다렸다.

후기의병으로 재기하다

재기를 노리던 김상태는 1907년 초, 이강년과 함께 봉기를 꾀하였다. 그러나 시작 단계에서 습격을 당해 이강년이 부상을 입어 그들은 다시 잠적하여 수개월 동안 청풍, 단양 등지에서 숨어 지내야 했다.

1907년 여름에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다시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 편승하여 김상태와 이강년은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마침 원주진위대가 해산되며 그 무기를 탈취한 많은 의병들이 제천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의병들은 대개 진위대 군인들과 강원, 경상 등지에서 거병한 부대로서 연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어 질서가 없었다. 김상태는 호좌의진의 맹장으로 이강년을 추대하여 의병부대의 정비를 꾀하였다.

김상태를 교수형에 처한 재판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1년 8월 4일)

김상태는 호좌의진에서 핵심 보직인 중군장에 임명되어 호좌의진의 핵심인물로 떠올랐다. 호좌의진의 중군부대를 이끌던 그는 영천의 조령, 문경의 갈평, 영월읍, 원주 싸리재, 죽령, 영춘의 백자동과 복상골 전투 등에 참전했다. 특히 10월 초 영월읍에서 전개된 전투에서는 그가 앞장서서 일본군의 진지로 돌입하는 활약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7년 12월 중순, 그는 이강년의 본진과 함께 영춘의 복상골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이강년의 본진과 분리되어 독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의병항쟁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하여 영남지역 의병들과 적극적인 협조를 통해 국면을 타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순흥 일대에 새로운 근거지를 구축하고 영남일대를 중심으로 항전을 계속하였다.

1908년 여름, 호좌의진을 이끌던 이강년이 청풍에서 체포되고, 백 여일 만인 10월 13일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또한 호좌의진의 중군이었던 조영인이 영월 상동에서 체포되고, 내리지역에 감춰두었던 무기를 대량 탈취 당하는 일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호좌의진은 위기를 맞이했다. 이에 김상태는 일단 부하들을 해산시키고, 그 해 겨울을 영월 칠령산에서 은거하였다. 김상태는 1909년 초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때 김상태 부대는 그가 직접 거느리고 있던 의병뿐만 아니라, 이강년의 휘하의 의병들도 그의 휘하로 모여들었고, 새로 모집한 의병들도 많아 그 수가 급증했다. 이것은 그의 타고난 의병장으로서의 리더십, 전기의병 이래의 투쟁 경력, 이강년 의병장 계승자라는 요인 등이 연대를 가능케 하여 대부대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김상태 부대는 1909년 가을까지 순흥, 문경, 덕산, 금수산, 영춘 등지에서 소부대 조직 활동을 통하여 유격전을 펼쳤다. 그러나 겨울이 되어 혹한이 몰아치자 그는 대규모 부대를 계속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부하들의 일부를 귀가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910년 3월, 다시 의병을 소집한 그는 단양 동면지역에서 일본군과 접전하며 항전의 범위를 태백산과 소백산 일대로 넓히며 신출귀몰한 투쟁을 주도하였다. 이에 일제는 그에게 거금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그러자 그의 심복이었던 우종응 등이 돈에 눈이 멀어 그를 밀고하여, 결국 그는 1911년 5월 순흥군 석천포에서 일제에 피체되고 말았다.

장엄한 최후를 맞이하다

대구경찰서로 수감된 그는, 1912년까지 3차에 걸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았다. 일제는 김상태의 순국 자정이 주는 여파를 두려워하며 '강도 및 강도 와주범(窩主犯)'이란 죄목으로 잡범 처리하여 3년형을 선고하였다. 이 선고에 대해 그는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라고 항의하면서 순사장이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아 그를 내리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상태 묘소. (충북 제천시 고암동 산 289번지 순국선열묘역내)

김상태는 "나는 틀림없이 살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일찍 자결하여 원수의 손에 욕을 당하지 않는 편이 낫다."라고 하고 음식 먹기를 거부하였다. 일본 경찰들은 기계를 사용하여 그의 입을 벌려 강제로 음식을 넣으려고 하였으나 끝내 그의 뜻을 꺾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단식 13일째인 1912년 7월 28일, 옥중에서 장엄하게 순절하였다.

이강년 의진에서 그와 함께 함께 활동했던 강순희는 그의 추도문에서 "공이 큰 절개로 시종하고 고인을 구하였으니 의병을 일으켜 도적을 토벌한 것은 인고경과 같고 … 도적에게 굴하지 않는 것은 장순(張巡) 허원(許遠) 같고, 도원결의한 것은 관우(關羽), 장비(張飛)를 본받았도다. 감옥에 유폐되었던 것은 문천상과 비길만하고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겠다고 했으니 백이(伯夷)와 같은 부류다. 살신성인한 것이 공이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라고 하며 그의 행적을 중국의 선현들과 비교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김상태는 죽기 전에 평생 동지였던 이강년의 무덤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이에 따라 이강년의 묘가 있는 제천 두학 장치미에 묻혔다. 이후 이강년의 묘소는 문경으로 이장되었고, 그의 묘소도 1984년 제천시의 '의병 묘역 성역화 계획'에 따라 제천시 고암동 의병골로 이장되었다. 이후 제천 유림들이 봄가을로 그의 묘소에 제사를 올리고 있으며,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장승순(문학박사, 충북대학교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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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철 헌정회장 "개헌 방향 '정쟁 해소'에 초점"

[충북일보] 대한민국헌정회(회장 정대철)는 27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국회박물관 대강당에서 '정치선진화를 위한 헌법 개정 대토론회'를 개최한다. 헌정회는 지난해 11월부터 헌법개정위원회를 구성해 개헌의 방향에 대한 연구를 통해 국가 100년 대계 차원의 조문을 만들었다. 이 연구에 이시종 전 충북지사도 참여했다. 정대철 회장은 "정쟁을 해소하는데 개헌의 방향의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헌정회가 개헌안 마련에 나서게 된 배경은. "헌정회는 오늘날 국민적 소망인 정치권의 소모적 정쟁 해소와 지방소멸·저출생 등 국가적 위기 상황에 적극 대처하는 것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라는데 인식을 같이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헌법에는 이러한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구 유럽처럼 정쟁을 중단시키는 장치인 내각불신임·의회 해산제도 없고, 미국처럼, 정쟁을 중재·조정하는 장치인 국회 상원제도 없다보니, 대통령 임기 5년·국회의원 임기 4년 내내 헌법이 정쟁을 방치 내지 보장해주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헌법개정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서 헌정회가 헌법개정안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동안 헌법개정은 여러 차례 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