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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홍사구

1896년 단발령 내려지자 거병 '제천의병'의 효시
王의 군대 자임하며 해산거부 관군과 한 달 대치
체포되자 양쪽 팔 잘리면서 저항 결국 총살당해
19살에 순절…장례금 모금하자 무려 1천 7백냥

  • 웹출고시간2015.09.20 17:57:28
  • 최종수정2015.09.20 15:46:13

홍사구가 전사한 남산전투의 모형(제천의병전시관)

[충북일보] 홍사구(洪思九, 1878~l896)는 1896년 제천의병에 참가하여 종사관으로 활동한 인물로 1896년 4월 13일 제천 남산전투에서 스승 안승우의 곁을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그의 곧은 충성과 큰 절개는 후세의 귀감이 되었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지평에서 스승 안승우를 만나다

홍사구는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원구리에서 아버지 홍성유(洪聖裕)와 어머니 성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남양이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으며, 문장력이 뛰어나고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그의 작은 할아버지 홍훈(洪·)은 경상도 관찰사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8대조는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한 삼학사(三學士) 중 한 명인 홍익한(洪翼漢)이라고 한다.

영주에 살던 그는 집안이 빈한해지자 경기도 지평으로 이주하였다. 마침 옆집에 학문으로 유명한 안승우가 살고 있었다. 그는 안승우를 본 후 흠모하는 마음이 생겨 아침저녁으로 그를 찾아갔다. 그의 정성에 감동한 안승우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 일제에 맞서 일어난 제천의병

제천의병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제천의병기념탑(제천의병전시관)

1894년 일제는 경복궁을 습격하여 광무황제를 사실상 포로로 하고 관료들을 위협하여 친일내각을 수립하였다. 제천 백련사에서 이 소식을 들고 분개한 안승우와 홍사구는 곧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호응하는 이가 없어 실패하였다.

경복궁을 점령한 후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조선과 만주지역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재차 친일내각을 수립하여 '내정개혁'을 강요하였다. 이 중 근대화와 위생이라는 명분으로 실행된 변복령(變服令)과 단발령(斷髮令)은 조선인들의 분노를 터뜨리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당시 조선의 양반 유생들은 검은색을 음사(陰邪)를 상징하는 불길한 색으로 여겼다. 또한 상투는 효의 상징으로 이를 자르게 하는 단발령은 조선인을 야만으로 전락케 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곧 변복령과 단발령은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1896년 유인석·안승우·이춘영 등 유학자들과 김백선 등 포군들은 전통질서 수호의 기치를 내걸고 의병을 일으켰다. 그들이 바로 제천의병이다.

◇ 왕의 진정한 군대

홍사구 전기가 수록된 '육의사열전' 표지

ⓒ 자료 제공 = 독립기념관
1896년 2월 유인석이 이끄는 제천의병이 남한강을 건너 충주성을 공격하자, 충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관군과 일본군은 후퇴하였다. 이 때, 홍사구는 종사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종군하지 못하여 충주성 공략에는 참여하지 못하였다.

충주성을 점거한 제천의병은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체포하여 강제로 단발령을 시행한 죄목으로 처단하였다. 그리고 충주 주변 군현의 힘을 모아 서울로 진격하고자 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해 좌절하고 말았다. 제천의병들이 서울로 진격하지 못하고 충주성에서 머물고 있을 때, 후퇴하였던 관군과 일본군이 충주성을 되찾기 위해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충주성에서 고립된 제천의병은 일단 근거지인 제천 지역으로 이동하여 의병을 다시 정비하였다. 그러자 문경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강년(李康秊) 부대 등 각처의 의병 부대들이 속속 제천으로 들어와 제천의병에 합류하였다. 군세를 다시 강화한 제천의병은 유인석을 중심으로 하여 주위의 단양·청풍·원주·영월·평창·정선 등지에 수성장을 임명하고, 제천으로 들어오는 요지에 병력 배치를 강화하여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제천의병이 군세를 재정비하자, 관군과 일본군은 제천으로 향하는 보급로를 끊으며 압박을 가하였다. 제천의병은 선봉장 김백선(金百先) 등에게 가흥을 공략하게 했고, 이강년의 유격군을 수안보·조령 일대에 보내어 활동케 하는 등 적극적인 공세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에 밀려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더욱이 여러 장수가 공동으로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증폭되어 초기부터 의병을 이끌어 왔던 선봉장 김백선이 처형되는 사건이 일어나 의병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한편, 아관파천 이후 정부는 친일내각이 붕괴되었다는 사유로, 제천의병에게 해산할 것을 요구하였다. 게다가 변복령과 단발령이 유명무실해지자 민간의 의병 참여 열기는 급속히 저하되었다. 정부의 해산 권유와 맞물려 농사철이 다가오자, 농민들의 이탈도 가속화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제천의병은 왕의 진정한 군대임을 자부하며 해산을 거부하였고, 장기렴(張基濂)이 이끄는 관군과 한 달이 넘도록 대치하였다.

◇ 장군을 두고 어찌 가겠습니까

제천의병이 관군과 맞서 싸운 전투지이나 현재는 고장숲길이라는 길 이름만 남아있다.

5월 25일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이 청풍으로부터 제천으로 쳐들어 왔다. 이에 제천의병은 중군장 안승우를 중심으로 남산에 사령부를 두고 고장숲(古場林)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때 중군장 안승우는 화약을 넣어 포군들에게 나눠주거나, 관군들에게 직접 돌을 던지며 의병들을 독전하였다. 아침부터 정오까지 계속되던 전투에서 의병들은 관군을 세 차례나 숲 밖으로 몰아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전투 초기 제천의병은 관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면서 기세를 올렸으나, 오후에 들어 화창하던 날씨가 갑작스럽게 강풍이 몰아치고 흙비가 쏟아지면서 전세는 급변하게 되었다. 의병들의 주력 무기인 화승총이 비에 젖으면서 쏠 수 없게 된 반면에, 관군들이 사용하고 있던 양총은 비와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회를 맞이한 관군이 일제사격을 가하며 공격해 오자 제천의병은 사방으로 흩어져 패배하고 말았다.

육의사열전에 수록돼 있는 '홍사구전'

ⓒ 자료 제공 = 독립기념관
한편 병으로 충주성 공략에 참전하지 못하였던 홍사구는 본진이 제천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종사관으로서 밤낮으로 안승우를 도와 제천의병의 재기를 도모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와중에서도 그의 품속에는 화서 이항로(李恒老)가 쓴 수양서인 ··화서아언(華西雅言)··을 늘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화서아언··의 내용은 성리학에 대한 설명과 함께, 당시 시대상황과 관련되어 이단과 서양 문화의 폐단 등을 서술한 위정척사 사상이 함께 서술되어 있었다. 이로써 보면 홍사구의 제천의병 참여는 유학자로서 성리학과 위정척사 사상에 기초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남산 전투에서 관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패한 제천의병은 모두 흩어졌고, 오직 홍사구만이 안승우 곁에 남아서 그를 호위하였다. 안승우는 홍사구에게 "나는 의병의 장수로서 죽음을 면할 수 없으나, 네가 나와 같이 죽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몸을 피할 것을 여러 차례 권하였다. 이에 홍사구는 "종사가 되어서 장수가 화를 입는 것을 보고 어찌 혼자만 살 수 있으며, 제자가 되어서 스승이 화를 입는 것을 보고 어찌 혼자만 살 수 있겠습니까· 친구 간에도 환란을 당하면 어버이가 계시다고 해서 피할 수 없는 일인데 더구나 스승에게 이겠습니까·"라고 하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홍사구는 안승우와 함께 남산에서 빠져나가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함께 관군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 때 홍사구는 관군을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금수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생각이 있다면 충신·역적과 사람·짐승의 구별은 알 것이다. 우리가 대의를 의지하여 적을 토벌하는 것인데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하며 왼쪽에 들고 있던 막대기에 숨겨놓았던 칼을 빼어 몸을 돌리면서 관병 1명을 베었다. 당황한 관군들은 검을 휘둘러 홍사구의 한쪽 어깨를 내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 저항하자 그의 나머지 한 쪽 어깨마저 내리쳤다. 양쪽 팔을 쓸 수 없게 되었음에도 홍사구가 물러섬 없이 관군을 꾸짖으며 항거하자, 결국 총을 쏴서 그를 죽였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홍사구의 최후를 목격한 관군들은 '지독하다', '무섭다'는 소리를 저도 모르게 연발했다고 한다.

◇ 영원한 제천인이 되다

홍사구 묘

충북 제천시 고암동 산 289번지 순국선열묘역내

홍사구가 전사한 며칠 후 동료 박정수와 이정규 등이 양팔이 잘린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모셨다. 그의 장례 때 제천의 사림들은 모두 글을 보내어 추모하였고, 충북 일대에서 장례 보조금으로 약 일천 칠백 냥이나 모금하였다고 한다.

홍사구는 비록 충북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제천의병으로 활동하였고, 그의 죽음에 충북인 모두가 애통해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묻혔던 무덤이 한동안 잊혔다가 후에 발견된 후 의림지 동남쪽 산중턱으로 이장하였다가, 2007년 4월 제천시에서 새롭게 단장한 '순국선열묘역'으로 다시 이장하였다. 영원한 제천인으로 영면한 것이다.

홍사구는 19살의 어린 나이에 나라를 구하고자 의병에 참전하여, 제천 남산에서 순국하였다. 이러한 그의 의기에 당시 함께 제천의병으로 활동하였던 동지 박정수는 그를 추모한 글에서 "공은 한 번 죽어 백세의 사표가 되었다."고 칭송하였다.

올해는 제천의병이 일어난 지 120주년이자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이다. 이러한 해를 맞이하여 홍사구와 제천의병의 충의정신을 되새기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 홍일교(독립기념관 학예사, 충북대학교 사학과 한국근현대사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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