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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홍범식

경술국치에 분개하여 최초로 자결 순국한 열사
아들은 죽음으로 일제 항거…아비는 친일
동부리 고가는 괴산 3·1운동 계획한 장소
괴산 아들 홍명희에 거부감 레드콤플렉스
금산은 순국지에 '홍범식 공원' 조성 대조

  • 웹출고시간2015.08.23 14:58:35
  • 최종수정2015.08.23 14:45:04

홍범식

[충북일보] 홍범식(洪範植, 1871~1910)은 괴산 출신으로 금산군수로 재임 중, 1910년 경술국치에 분개하여 최초로 자결 순국한 열사이다. 그의 아들은 ≪임꺽정≫으로 유명한 홍명희이고, 손자는 북한 사회과학원 원장을 역임하고 ≪조선왕조실록≫ 번역 사업을 총괄한 홍기문이며, 증손은 2004년 소설 ≪황진이≫로 만해문학상을 받은 홍석중이다. 한편 그의 부친 홍승목은 중추원 찬의 등을 지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인물이다. 그의 가족사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민족분단이 빚은 우리의 아픈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괴산읍 동부리 홍범식·홍명희 고택

괴산읍 동부리 450-1번지에 말끔하게 복원된 고가가 있다. 이 고가는 1730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선시대 중부지방 양반 가옥의 건축 문화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충청북도 민속자료 제14호).

홍범식 고택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50-1

이 고가는 홍범식이 나고 자란 곳이다. 뿐만 아니라 홍명희가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내판에 홍명희와 관련된 내용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괴산에서 홍명희를 제대로 기리는 것은 시간을 더 요하는 것 같다. 홍명희 문학제가 파행한 것은 아직도 괴산에 어른거리는 '레드 콤플렉스'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홍명희가 북한 정권에서 내각 부수상을 지낸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대로 따져야 할 일이다. 그가 부친 홍범식의 자결 순국에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고, 우리 문학사에서 빛나는 ≪임꺽정≫을 저술한 것은 또 그것대로 평가되어야 할 일이다. 특정 사상이나 이념의 잣대로 한 인물의 전 생애를 통째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3·1운동 주도 직후 제월리로 이사

홍범식·홍명희 고가는 그들 부자의 태생적 연고만 있는 곳이 아니다. 이 집은 1919년 충북 최초의 만세운동이 계획된 역사적 장소이다. 광무황제의 인산에 참배하고 귀향한 홍명희는 3월 19일의 괴산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18일 삼촌 홍용식, 서부리에 살던 이재성 등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3백매를 인쇄하였다. 그들은 19일 괴산 장터에 모인 장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홍용식은 홍범식의 동생으로 조카인 홍명희와 함께 괴산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이는 충북 최초의 본격적인 만세시위였다. 다음 장날인 24일에도 연속하여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주도자는 홍명희의 동생 홍성희였다. 홍명희와 홍용식은 이 때 피체되어 1년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고, 홍성희도 1년의 옥고를 치렀다. 곧 이 고택은 괴산의 풍산 홍씨가 주축이 된 충북 최초 만세운동의 산실로서 의미를 지닌 곳이다.

동부리 고가에서 승용차로 5분 거리인 제월리 365번지(제월 4길 46)에 또 하나의 고가와 선영이 있다. 이 고가는 한동안 홍명희의 생가로 잘못 알려져 왔다. 당초 이곳은 풍산 홍씨의 묘소를 관리하던 묘막이었다. 홍범식의 「제적부」에는 1919년 5월 5일에 이곳으로 이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괴산의 3·1운동 주도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홍범식 묘소

충북 괴산군 괴산읍 제월리 365

제월리 선영에는 홍범식의 증조부 홍정주, 조부 홍우길, 부친 홍승목과 그의 묘소가 있다. 홍범식의 묘소는 선영의 가장 오른쪽에 위치해 있다. 그의 묘소에서 마주 보이는 앞산에 홍승목의 묘소가 있다. 그는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었는데, 아들은 죽음으로 일제에 항거하였으나, 아비인 그는 친일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홍범식군수애민선정비

전북 태인군 태인면 태창리 피향정 내

◇'전북 제일의 군수' 홍범식의 선정과 자결 순국

1907년 태인군수로 부임한 홍범식은 선정을 베풀어 군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군민 중에는 그의 선정을 칭송하기 위해 ≪황성신문≫에 광고를 내 그를 '전북 제일의 군수', '태인군이 생긴 이래 이런 군수는 처음'이라고 치켜세울 정도였다.

태인에는 그의 선정을 기리는 기념비가 남아 있다. 태인면 태창리 피향정 경내의 '군수홍범식애민선정비', 정읍시 감곡면 방교리 감곡면사무소의 '홍범식휼민선정비',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의 야정 노인정의 '군수홍범식선정비' 등은 그의 군수 재임 시의 선정을 칭송하는 군민들의 마음이 담겨져 있다.

1910년 8월 29일의 경술국치 당일, 그는 망국의 비통한 소식을 들었다. 미리 자결을 결심하고 유서를 마련해 둔 그는, 날이 어스름해지자 재판소 서기 김지섭(金祉燮)을 불러 단단히 밀봉한 상자를 건네며 열어 보지 말고 집으로 가져가라고 명하였다. 그 안에는 여러 통의 유서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홍범식은 곧 객사로 나가 임금께 북향사배를 올리고 아래채로 와서 목을 매어 자결을 시도했다. 이를 본 그의 사령이 울부짖으며 황급히 제지하자, 그는 사령을 따돌리고 어둠 속에서 조종산으로 달려갔다. 관인과 군민들이 횃불을 들고 군수를 찾아 나섰으나, 이미 군수는 객사 후원의 낮은 소나무 가지에 목매 숨이 끊어진 뒤였다. 나무 가지가 연약하여 처져서 그의 몸은 땅에 비스듬히 늘어져 마치 누워 자는 듯한 모습이었다.

홍범식이 두 며느리에게 남긴 유서

며느리가 분실에 대비하여 베껴놓은 것.

홍범식은 자결 당시 품안에도 유서를 지니고 있었다. 일제는 그의 몸을 수색하여 이 유서를 압수해 갔으나, 김지섭이 가지고 있던 유서의 존재는 알지 못하였다. 김지섭은 이 유서를 잘 숨겨두었다가 홍명희에게 전해 주었다. 유서는 할머니와 부모, 부인과 자제, 며느리와 딸, 어린 손자에 이르기까지 십여 통이나 되었다.

◇유방백세(流芳百世), 홍범식 순국의 유훈

일제는 홍범식의 순국이 미칠 파장을 우려하여 그의 자결 동기를 왜곡하여 알렸다. 즉, 일제는 그가 일제의 침략에 분개하여 순국한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광증(狂症)이 발(發)하여', 즉 미치광이 증세가 발동하여 자살한 것으로 폄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결 순국 소식은 순식간에 국내외로 전해지며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신한민보≫는 그의 자결 순국을 신속하게 미주 동포사회에 보도하였다. 이후 그의 순국은 독립운동 단체나 해외 동포사회에서 망국일을 맞이하여 독립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소재가 되었다.

홍명희는 부친이 유서에서 당부한대로 친일을 하지 않고자 노력하였고, 아들 기문에게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월북한 후에도 부친의 유서를 액자에 담아 벽에 걸어 두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올려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그는 말년의 어느 날, 자식들에게 자신은 ≪임꺽정≫의 작자도 아니고 학자도 아닌, 애국자 홍범식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손자 홍기문도 할아버지의 유훈을 따라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다. 그는 할아버지의 묘 앞에서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기의 핏줄이 성한 그날까지 할아버지의 이름을 욕되지 않게 할 것을 굳게 맹세하였다.

홍범식의 순국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의 길을 걸은 것은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애국지사들이 그를 따라 자결로써 일제에 항거하거나, 그를 본보기로 삼아 독립투쟁에 나섰다.

김지섭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홍범식의 자결을 지켜보며 그 영향을 받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 1924년 일본 왕궁의 니주바시(二重橋) 투탄 의거를 결행하였다. 고향이 금산인 송철(宋哲)은 홍범식 군수의 죽음을 목도하며 일본에 대한 적개심에 비분강개하여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하고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에 나섰다.

홍범식의 죽음은 동료 군수들에게도 충격이었다. 당시 이천 군수로 재임하던 조용하(趙鏞夏)는 홍범식의 자결 순국 소식을 듣고 군수직을 사직하고 망명하여 중국과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요컨대 홍범식의 자결 순국은 아들과 손자가 독립운동의 길을 걷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표상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국내외 동포들에게 해마다 경술국치를 기억하고 독립 쟁취의 결의를 다지는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독립운동사에서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금산군수 시절 관아에서 관원들과 기념촬영

앞줄 가운데 흰옷 입은 사람이 홍범식

◇금산의 순국지에 조성된 '홍범식 공원'

홍범식이 군수 재임 당시 기거하던 금산관아는 헐리고 없는데, 그 위치는 현재 금산초등학교 일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최초로 자결을 시도했던 금산객사(금계관) 역시 헐렸는데, 지금의 중앙초등학교 부근으로 전해진다.

금산읍에 조성된 홍범식공원(순절비와 일완정).

홍범식이 자결 순국한 금산읍 상옥리 조종산에는 '홍범식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당초 이 공원은 금산공원(일명 상옥공원)이라 불렀다. 그러나 2008년 금산읍이 홍범식 순절비와 순절지비(殉節址碑)를 이곳으로 옮기고, 정자 이름도 그의 호를 딴 '일완정(一阮亭)'으로 붙인 뒤, 공원 이름까지 '홍범식 공원'으로 바꿔 그의 순절을 기리고 있다.

그의 순절비는 1949년 이 지역 유림들의 발의로 시내에 건립하였다가,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오는 29일이면 그의 순국 105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금산의 활발한 홍범식 기념사업과는 달리, 정작 고향인 괴산에서는 생가 복원 외에 별다른 기념사업 계획조차 없는 듯해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

/ 박걸순(충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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