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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인도인, 해괴한 논리로 한국인 가슴에 못 박다

인도인 팔 판사 "전범은 개인죄가 아니기 때문 모두 무죄"
아베 "침략의 정의는 어렵다"라는 발언 이미 이때 언급
反英 투사 수바스 찬드라 보스 '적의 적은 아군' 역시 해괴
결국 A급 전범중 종신형 선고자는 '슬금슬금' 모두 풀려나

  • 웹출고시간2013.05.21 16:44:42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30. 야스쿠니신사에 세운 인도인 기념비(상)

야스쿠니신사에 세운 인도인 라드하 비노드 팔(Radha Binod Pal) 판사의 현창비

■ 인도인 라드하 비노드 팔 판사

야스쿠니신사에 이상한 기념비가 하나 있다. 법복 차림의 사진 옆에 어록이 적혀있고, 아래에는 야스쿠니신사의 책임자인 궁사(宮司)의 이름으로 헌사를 붙였다. 2005년 6월 25일에 세운 인도인 라드하 비노드 팔(Radha Binod Pal, 1886~1967)의 현창비(顯彰碑)이다.

캘커타대학 부총장을 지낸 그는 캘커타고등법원 판사와 인도정부의 법률고문을 역임했다. 1946년에 인도총독부가 도쿄전범재판의 판사로 보냈는데 수속과정의 오류로 그가 선임되었다고 한다. 도쿄에서 그는 기상천외한 주장으로 튀게 된다. 평화에 대한 범죄를 다룬 이 A클래스 재판이 위법이며 피고 전원이 무죄라는 것이다.

전범재판은 천황의 면책과 반인륜 범죄를 저지른 731부대의 처벌 제외 등 미국의 판단착오와 타협 등 여러 이유로 결국 실패했다. 재판에 회부된 28명은 교수형 7명, 종신형 16명, 유기금고형 2명, 소추면제 1명으로 판결되고 2명이 옥중 병사했다. 정작 처형된 것은 교수형을 받은 7명뿐이었고, 종신형 등은 슬금슬금 풀어주었다. 아시아와 태평양 일대에서 어마어마한 사람이 희생된 8년 전쟁의 처리는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무죄를 주장한 팔 판사의 의견은 무엇인가. "패자에 대한 승자의 심판이기 때문에 정당한 판결을 내릴 수 없다. 전범의 개인 책임은 인정할 수 없다. 침략의 정의는 어렵고, 침략 행위가 공동모의라는 것을 입증하기 어렵다" 어디서 듣던 말이 아닌가.

아베총리가 올해 5월 23일 참의원에서 "침략의 정의는 국제적으로도 정해지지 않았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이런 표현은 팔 판사 어록에 있는 헛소리의 일부이다.

제국주의 침략사에서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인도의 지식인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무리 봐도 인도인의 논리와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얄팍하다. 왜 그런가. 팔 판사는 인도 독립투사인 수바스 보스의 추종자였다.

인도 독립투사인 네타지 수바스 찬드라 보스(Netaji Subhas Chandra Bose)

타골(Rabindranath Tagore, 1861~1941)은 이렇게 노래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인도에는 이런 시인만 있지 않았다.

팔 판사와 수바스 보스! 그는 누구인가. 한국과 직접 관련이 없는 인물이지만 누구보다 한국에 상처를 준 사람들이었다.

■ 수바스 보스의 투쟁 원천

인도의 반영 독립투쟁은 간디의 비폭력운동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직접 영국과 전쟁을 해서 독립을 쟁취하자는 지도자도 있었다. 그가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 1897~1945)였다.

인도 지도를 보면 히말라야산맥과 데칸고원 사이에 거대한 저지대가 동서를 가로지른다. 서로는 인더스강, 동으론 갠지스강이 흘러내리는 평평한 대규모 경작지이다. 여기가 인류문명의 중요한 산실이었다.

벵골만 갠지스강 하류 일대에는 너비 320Km의 삼각주가 펼쳐져 있다. 국토의 약 1/4을 차지하는 이 검은 색 평야에서 밀, 사탕수수, 면화가 자란다. 이 일대는 세계에서 가장 기름지고 인구가 밀집한 지역인 동시에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기도 했다.

벵갈지역의 황금기는 무굴왕조 때였다. 그러나 1707년 마지막 황제 아우랑제브가 사망한 이후 이 지역엔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무슬림 나왑왕조를 등장시키고 실권을 차지했다. 그리고 1757년 플라시전투에서 프랑스를 제압한 후 점차 인도 전역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후 200년 가까이 소수의 힌두교도들을 앞세운 영국이 다수의 무슬림교도를 지배하는 방식으로 수탈해온 결과 벵갈 일대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변했다.

보스가 다닌 꼴까따의 캘커타 프레지덴시 대학(Presidency College Calcutta, Kolkata)

수바스 보스는 영국지배의 거점인 꼴까따(영어식 이름은 캘커타)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식민지 교육의 수혜자였다. 그가 철학을 배운 캘커타 프레지던시대학은 1816년에 세운 유서 깊은 대학이었다. 그러나 영국인 교수에게 항의를 제기한 때문에 정학처분을 받은 것을 보면 고분고분한 학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출세의 지름길로 통하는 영국의 공무원시험에 합격했지만 1921년 인도로 돌아와 국민회의에 들어간다.

인도의 비폭력 독립운동을 이끈 네루와 간디 .

인도국민회의의 중심은 간디와 네루였다. 그러나 보스는 비폭력 무저항운동에 동조하지 않고 과격 투쟁을 주도하다가 연이어 투옥되었다. 보스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이런 설명이 투쟁의 원천이라고 믿었다.

"쿠루족의 두 가문인 카우바라와 판다바 형제들이 왕권을 둘러싸고 쿠루쉐트라 평야에서 대치했다. 판다바 형제들은 왕위를 차지할 명분이 있었지만 적진에 사촌과 아저씨 등 혈족이 가세한 것을 보고 고뇌에 빠졌다. 최고의 신 크리슈나는 판다바 형제에게 단호히 '싸우라'고 말한다. 슬픔과 미혹에서 야기된 장애를 제거하고 의무를 다하라는 것이다."

■ 악마와도 손잡겠다는 보스

1931년 보스는 치료를 위해 간 비엔나에서 저항투사인 사다르 발레브하이 파텔(Sardar Vallabhbhai Patel, 1875~1950)을 만나 감화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인도 내의 영국 감시에서 벗어나 활동할 필요를 느끼고, 유럽에 머물면서 무솔리니 등 저명인사와 교류하며 견문을 넓혔다.

이제 보스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귀국 즉시 연금되기도 했으나 그는 간디의 추대로 1938년 국민회의 의장이 된다. 그는 더 과격한 투쟁을 지향했다. 그러자 대화와 협상으로 자유를 찾을 수 있다는 간디지지자들의 반대에 직면했고, 1939년 의장선거에서 낙선하게 된다.

꼴까따의 역사를 담고 있는 인도박물관.

인도경찰이 보스를 체포했지만 7일 간의 완강한 단식투쟁 때문에 풀어주고 가택연금 조치를 취하였다. 그 기회를 타고 보스는 1941년 델리와 카불을 거쳐 모스크바로 탈출했다. 극적인 망명이었다. 목적지는 나치스가 지배하는 베를린. 2차대전은 그에게 반영투쟁을 격화시킬 기회였다.

보스는 민주주의가 중요하나 인도의 가난과 사회 불평등을 극복하려면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전쟁 동안 추축국과의 동맹이 이상적인 실용주의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식민지배를 타도하기 위해선 악마와도 제휴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보스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약속했다. 하인리히 히믈러 등 나치스지도자의 협력 아래 방송활동을 시작했다. 전 세계 인도인에게 반영 투쟁을 호소한 방송은 보스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놀랍게도 군대도 갖게 되었다. 북아프리카에서 롬멜에게 잡힌 영국군 소속 인도병사 4,500명을 인계받은 것이다. 독일식 훈련을 다시 받은 인도병사는 보스의 휘하에서 반영 군대로 재편되었다.

오늘날 인도의 시장풍경.

최고사령관 보스가 지휘하는 인도군은 영국과 싸울 기회가 없었다.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한 후 패배를 거듭하자 아프가니스탄을 통해 인도로 가려던 계획은 틀어졌다. 보스가 더 이상 베를린에서 할 일이 없었을 때 아시아의 상황이 달라졌다.

동남아를 침공한 일본군이 홍콩과 필리핀을 점령하고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버마로 북진하며 인도로 접근했다. 보스는 일본으로 가기를 원했다. 그래서 베를린 주재 일본대사 오시마 히로시(大島浩, 1886~1975)를 만나 그의 꿈을 설명했다. 독이일 3국동맹을 성사시킨 육군중장 출신 오시마 대사는 즉시 도쿄에 알렸다.

히틀러 동의 아래 보스의 일본행이 전례 없는 방법으로 추진되었다. 독일은 주변 모든 나라와 전쟁 중이라 육로와 항공로로 갈 수 없었다. 남은 방법은 해로뿐이었다. 바다에서도 선박으로 일본까지 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잠수함을 타고 가기로 비밀리에 결정했다.

독일과 일본 해군은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아프리카 해안까지는 독일잠수함을 타고 가고, 거기서 일본잠수함을 갈아탄다는 것이었다. 이 시도는 성공하였다. 보스는 1943년 2월 8일 U-180 잠수함에 타고 출발하였다. 4월 28일 모잠비크 해안에서 고무구명대를 이용해 일본 I-29 잠수함으로 갈아탄 다음, 5월 6일 수마트라 사방에 도착하였다. 무려 3개월에 걸친 바닷속 여행이었다.

비행기로 페낭과 마닐라, 그리고 사이공과 타이완을 거쳐 도쿄에 도착한 날은 1943년 5월 16일. 침략전쟁을 감행하던 일본제국의 도조 히데키 총리에게 그만큼 큰 횡재가 없었다. 이제 보스는 대동아공영권 선전에 더할 나위 없는 광고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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