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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무라타 소총을 보자 "일본의 진보가 놀랍군요"

청국에 들어가 이훙장(李鴻章) 장지동(張之洞)을 만나 정탐
천진기기국과 금릉기기국에서 양무운동의 군사면 실체를 파악
청국공사관 무관인 가미오 미츠오미(神尾光臣)는 간첩의 핵심

  • 웹출고시간2013.09.03 19:08:36
  • 최종수정2013.09.03 15:54:15
44. 청일전쟁과 조선침략의 핵심 인물은 가와카미 중장과 무쓰 외상

■ 고종을 농락한 가와카미 소로쿠

고종은 가와카미 소로쿠에게 일본이 선물로 준 무라타(村田) 소총에 관해 이렇게 말을 했다. "지난해 귀국에서 소총을 증정했는데 그 총기는 정량(精良)했다. 귀국의 진보는 놀랍다."

청국 포대에 거치된 대포.

그러자 가와카미는 일본의 무기 제작 능력에 자신을 갖는 응답을 했다. "우리나라는 대포와 소총을 태서(泰西) 여러 나라에서 구입했지만 최근에는 대포와 소총 모두 일본에서 제조합니다. 이 소총은 육군소장 무라타가 연발총으로 만들었는데 태서 나라들의 연발총보다 더 낫거나 못한 바가 없습니다."

또 고종에게 총을 다룰 때 조심하라는 말도 했다. "이 총기는 처음에 숙련되지 않으면 위험한 까닭에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문제가 있으면 와다나베(渡邊) 대위에게 언제나 참전(參殿)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공사관에 소속된 정보장교를 궁궐에 출입시키겠다는 말이었다.

조선을 침략할 준비를 마치고 예비답사를 하듯 경복궁에 들어가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한 말들이었다. 끔찍한 일로서 그 상황을 그냥 넘겨볼 수가 없다. 가와카미 소로쿠는 1894년 7월의 경복궁 기습과 1895년 10월의 을미사변을 일으킬 때 군사 작전을 최종 결정하는 위치에 있었다.

『대장 가와카미 소로쿠』의 조선순유편에 나온 가와카미의 생모사진.

"고종이 만만해 보이지 않았을까." 아무나 국왕을 알현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가와카미는 유럽에 있을 때 독일제국의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러시아황제를 직접 만나본 적이 있었다. 전성기 유럽 대국의 궁궐에서 당당했던 황제들을 만나본 그에게 고종은 작아보였을 것이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후 청국의 위안스카이에게 간섭을 받는 위에 서구 열강의 압박에 시달리던 고종은 약소국의 한 군주였을 뿐이다.

"각하가 육군중장으로 진급한 것은 어느 전공에 의한 것인가." 일본 내전에서 두 차례 군공을 세운 것을 말할 때 가와카미는 동아시아의 패권국가인 청국과 일전을 겨룰 생각만 하고 있었다.

고종은 당시 상황이 심각한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귀국과 우리나라는 대소와 진보의 차이는 있지만 친선의 정신으로 제휴하고 있는 것은 동일하다. 경은 돌아가서 천황폐하와 황태자 전하 및 정부 당국자에게 그 뜻을 전해주기 바란다."

■ 청국을 정탐한 가와카미 소로쿠

가미오 미츠오미(神尾光臣, 18554~1927).

1893년 청국에 스파이로 나가있던 그는 청일전쟁 때 제2군의 정보주임참모로 활약한다.

약 한 달에 걸친 조선 정탐보다 더 중점을 둔 일이 청국의 형세 관찰이었다. 가와카미 일행은 5월 11일 청국으로 건너갔다. 이미 청국에는 요소요소에 참모본부가 파견한 스파이들이 영사관 등을 거점으로 암약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정세를 보고 받고 현지를 돌아보았다.

그에게 천진에서 정세를 보고한 공사관 무관 가미오 미츠오미(神尾光臣, 18554~1927) 소좌는 청일전쟁 때 제2군의 정보주임참모로 발탁된다. 가와카미에게 신임을 받은 그는 전후 계속 청국공사관에서 스파이 조직을 관장하다가 1897년 근위보병 3연대장으로 도쿄에 들어온다. 그의 군 이력은 화려하다. 청국주둔 군사령관과 9사단장 등을 거치고 전공에 의해 화족이 되는데 도쿄위수총독 직책을 맡을 때 대장으로 승진하였다.

이런 인물들은 청국 내에서 오래 근무하며 정보망을 단단히 갖춰놓았다. 5월 14일에는 가미오 소좌 등과 함께 청의 실권자인 북양대신 중당 리훙장(中堂 李鴻章, 1823~1901)을 찾아가 만났다. 리훙장은 이 위험한 인물을 실체를 알지 못하고 당하까지 내려와 응접실로 맞아들였다.

북양대신 중당 리훙장(中堂 李鴻章, 1823~1901).

가와카미는 그날 오후 천진 일대의 성곽을 조사하여 기록에 남겼다. "외곽 주위가 40리, 높이 2칸 혹 2칸 반, 북쪽은 해자에 물이 있고, 서쪽은 전망이 자유로워 공격에 유리하다." 16일에는 무비학당(武備學堂)을 방문해서 포병의 훈련 상황을 보고, 17일에는 천진 기기국(器機局)을 방문해서 독일인 교관이 이끄는 소총과 포탄 제조 실태와 화약 제조 상황을 점검하였다.

22일에는 북경에 도착해서 북경 일대의 정세를 살폈다. 25일에는 창평의 동문 앞에서 직예제독 예쯔차오(葉志超)가 50여기를 거느리고 가는 행렬을 마주쳤다. 청일전쟁에서 적장으로 만나는 인물을 보게 된 것이다.

6월 16일에는 상해로 갔다. 청국과 전쟁을 하려면 청에 조차지 등 이해관계가 있는 서구 열강의 동정을 염탐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서도 미리 파견되어 있던 일군의 스파이들이 마중을 나왔다. 강남을 도는 일정에는 남경의 금릉기기국(金陵器機局)을 보는 것이 중요했다. 25일에는 금릉기기국을 방문해서 직공 천여 명이 6cm포와 기타 산포(山砲, Mountain Gun)를 제조하는 공장을 둘러보았다. 20년 전에 만든 기기국은 벌써 뒤떨어진 상태였다. 이 시기에는 그처럼 세계의 무기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일본군에 점령된 청군 포대 사진. 이런 무기를 가와카미가 정탐하였다.

가와카미는 남경에서 양강총독 류쿤이(劉坤一, 1830~1902)를 만난다. 무창에서는 호광총독 장지동(張之洞, 1837~1909)도 만나는데 이들은 함께 양무운동을 지도했던 관료였다. 이훙장을 비롯한 청국의 주요 관료를 만난 후 가와카미는 청국이 근대 전쟁을 이끌 지도력이 없는 것을 현지에서 간파했다. 가와카미는 조선과 청국의 정탐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라 7월 4일 고베에 도착한다.

■ 침략의 선두에는 가와카미 참모차장과 무쓰 외상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1844~1897) 외상.

1894년 조선침략과 청일전쟁을 선두에서 이끈 인물이 가와카미 소로쿠 참모차장과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1844~1897) 외상이다. 오가와 엔손(小川煙村)은 『대일본대외전쟁비화(良國民社 간행, 1943년)』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무쓰 무네미츠와 가와카미 소로쿠는 실로 우리 제국의 꾀주머니이다"라고 한 말을 쓰고 있다. 청일전쟁의 승전 결과를 두 사람의 공으로 돌리는 평가였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이 전쟁을 감행하는데 망설이지 않았던 것은 무엇인가. 당시 국제 정세를 보면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고, 열강은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도 서구 제국주의국가들처럼 여기에 편승하는 것이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고, 열강으로 대두하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전쟁에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였다. 그것을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가 담당하였다. 유럽에서 보고 배운 것이 침략전쟁의 방법이었다.

또한 국가 간의 전쟁에는 타국의 이해관계가 개입되지 않을 수 없었다. 청국에는 이미 주요 도시에 열강이 조차지를 확보하는 등 깊숙이 이권을 챙겨놓고 있었다. 청국과 전쟁을 해서 승리해도 그런 이해관계를 침범할 수 없었다. 그런 설득은 외교로 풀어야 하는 문제였다. 무쓰 무네미쓰 외상은 사카모토 료마나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교유하던 사이였다. 이제 군사력이 갖춰진 위에 못할 짓이 없었다.

무쓰가 쓴 외교기록인 『겐겐로쿠(蹇蹇錄)』는 그 사실을 잘 알려주고 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는 침략을 위한 여러 장식의 하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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