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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왜 '25세 선생·10대 학동' 수준을 못 벗어나나

우익의 비극적 역사인식 뿌리는 메이지 유신에서 시작
그 정신적 지도자는 '요시다 쇼인'으로 침략 전쟁 구상
이등박문 그 제자… 전 아베총리 "가장 존경한다" 답변

  • 웹출고시간2012.10.30 18:24:28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5. 일본은 왜 25세 선생-10대 학동 수준을 못 벗어나나

메이지유신은 세계적인 성공 사례이다. 서구 문화를 수용해서 정치와 사회체제를 바꾸고 부국강병을 추구한 이 실험은 동아시아 근대화의 기점이 되었다. 한국과 중국 등의 지사들은 메이지유신의 성과를 바라보면서 근대 변혁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어느 나라도 일본의 선구적인 성과를 고마워하지 않는다. 동아시아를 파탄으로 내몬 침략전쟁이 바로 메이지유신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이론적 지도자인 요시다 쇼인이 그런 제국주의 침략전쟁 구도를 처음 만들었다.

■ 아베 신조 전총리, 애국심 교육강화 공약

일본 극우정치인 아베 전총리가 다시 자민당 총재로 선출되었다. 다음 총선에서 자민당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는데 아베 총재는 이미 "애국심 교육의 강화"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역사교육에서 침략과 수탈의 실상을 왜곡 은폐하고 더 나아가 합리화하려는 시도가 뻔히 보인다. 앞으로 한중일 역사분쟁이 격화될 것 같다.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와 나가토시가 지역구인 아베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했다. 쇼인은 누구인가.

메이지유신이 태동한 땅이라고 끈 커다란 돌비석. 요시다 쇼인 신사 입구에 있다.

그는 야마구치현 하기 출신으로 도쿠가와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도자라고 한다. 일본 역사사전은 그가 무사계급으로 사상가, 교육자, 병학자, 지역연구가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명성을 갖게 된 것을 보면 그의 능력이 남달랐을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과 필리핀으로 보면 침략전쟁의 원흉이다. 아니 원흉의 원조가 된다.

'지킬박사와 하이드'로 그를 비유하면 이해가 쉽다.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의 이론적 지도자인 동시에 전쟁으로 치닫게 만든 존재이고, 한국과 동아시아에서는 침략전쟁의 원흉으로 매도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쇼인은 조슈(長州)번이 세운 명륜관에서 병학(兵學)을 배웠다. 전근대 군사지식을 쌓은 그는 아편전쟁의 전말을 듣고 서양학문을 배운 직후인 1853년에 미국의 페리제독이 흑선을 끌고 오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외국사정을 더 알기 위해 어두운 밤에 미국 군함을 타고 밀항하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하였다. 그 죄로 에도막부의 감옥에 갇혔다. 24세 때의 일이었다.

요시다 쇼인이 1857년에 학동을 모아 가르친 사설학원 쇼카손주쿠.

감옥에서 풀려나 자택 유폐생활을 할 때인 1857년에 사설학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열어서 1년 남짓 10대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짧은 기간에 가르친 학생 수십 명 중에 조슈번을 개혁하거나 막부를 타도하는 선봉장들이 나오게 된다. 이들이 메이지정권을 장악해서 대외 침략전쟁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 야마구치현 하기의 요시다 쇼인 제자들

하기의 옛골목 풍경(왼쪽), 필자가 지난 7월 방문했을 때 촬영한 지금의 하기 골목 풍경.

야마구치현 하기(萩)시는 관광지로 이름이 높다. 긴 골목과 하얀 벽이 있는 주택들로 들어찬 조카마치(城下町) 모습을 보면 마치 에도막부에서 시간이 멈춘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전통사회의 일본을 보기 위해 동해바다가 인접한 인구 5만의 작은 도시 하기를 찾아온다.

그러나 방문객이 주로 찾는 곳은 역사인물의 연고지이다. 조슈번의 근거지인 하기의 인물들이 메이지정권 이후 일본 정치와 군부를 주도해왔다. 조금만 나열해도 놀랄 정도이다.

하기 거리에 있는 가쓰라 타로 안내판.

메이지유신의 핵심 공로자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1833~1877)와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1939~1867)를 비롯 육군대장 출신으로 총리를 역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2), 가쓰라 타로(桂太郞, 1848~1913) 등이다. 한국인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도 여기서 배웠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도 그 영향을 받았다.

줄지어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 기도 다카요시와 다카스기 신사쿠의 옛집이다. 안내인이 사근사근 집에 얽힌 이야기를 해준다. 집 구조를 바꾸지 않아 살던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오랜 가구를 전시하고 사진도 보여줘서 옛주인이 다다미방을 통해 나올 것 같다.

이들 메이지시대를 연 인물들의 생애를 보면 스승인 요시다 쇼인과 같이 이중인격의 전형이 드러난다. 일본을 근대화하고 부국강병을 이루는 험난한 목표를 이뤄냈지만 이웃나라에는 근대무기로 무장한 신식군대를 보내서 침략을 감행하였다. 결국 일본에 전범국의 오명을 씌워준 책임은 이들로부터 시작된다.

■ 침략전쟁을 세뇌시킨 요시다 쇼인

요시다 쇼인은 이들에게 어떻게 무엇을 가르쳤는가. 한 마디로 그의 교육은 볼만했다. 새로운 세계를 전달하는 방법과 내용은 혁신 일색이었다.

요점을 말하면, 세계정세의 파악을 강조했다. 좁은 일본에 갇혀서 생각하지 말고 변화하는 세상을 주시하면서 언제나 정보를 확보하라고 주문했다. 또 실용학문을 중시했다. 유학경전을 달달 암기하거나 공리공론을 중시하는 과거의 학문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것만 해도 신선했지만 가장 학생들을 혹하게 한 것은 토론 교육이었다.

쇼인은 언제나 일본의 현실과 이상에 대해 난상토론을 벌이며 함께 결론을 맺었다고 한다. 이것은 쇼인의 생각을 확실히 전달시키는 방법이었고, 그 결과 제자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의 역사관과 현실관은 일종의 신념으로 전파되었다.

교육 내용의 핵심은 「유수록(幽囚錄)」 등에 담겨 있다. 그는 고대 신화를 기록한 『일본서기』를 맹신해서 이른바 한 번도 혈통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 존재를 우월성의 근거로 삼았다. 이는 그대로 이토 히로부미의 황위계승 원칙에 반영되었고 지금까지 일본인을 동화와 같은 세계에 머물러 살게 하고 있다.

쇼인의 기형적 주장이 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노골적인 침략 조장이다. 즉 군대를 양성해서 홋카이도를 개척하고, 오키나와를 일본영토로 만든 다음에는 조선을 속국화하며, 만주와 대만 그리고 필리핀을 지배하라고 한 것이다. 바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군국주의 일본이 수행한 침략정책의 원형이 이것이었다.

그는 과격하면서 무모했다. 외세 배척을 주장하며 사회를 뒤흔드는 과격파를 도쿠가와 막부가 탄압하자 당시 정치를 주관하던 막부의 다이로(大老)를 암살하려고 시도하였다. 이것이 발각되어 결국 1859년 만 29세에 처형이 된다.

■ 25세 선생과 10대 학동의 수준

청년 시절의 이토 히로부미(오른쪽 상단·원)와 이노우에 가오루(왼쪽 아래).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고 해도 이토 히로부미 등 10대 학동을 가르친 쇼인의 나이는 25세였다. 그런 사람을 마치 대표적인 사상가나 교육자로 말하는 것은 낯 뜨거운 일이다. 선생이나 학동이나 여러모로 설익은 때이다.

요시다 쇼인은 구미 열강에게 빼앗긴 이권은 인근 나라를 침략해서 복구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은 일본이 침탈당하는 상황이 아니다. 또 과거처럼 침략을 용인하는 동아시아 상황도 아니다. 지난날의 침략을 반성하라는 요구가 자존심에 걸린다면 아직도 가치관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아베 전 총리의 언동에서 요시다 쇼인의 잔상을 보는 것은 답답한 일이다.

쇼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서 대외 침략정책을 편 결과는 참담했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지금도 가시지 않은 혹심한 참화를 가져왔지만 일본 곳곳에서도 군국주의 유물이 악마구리처럼 남아있다. 전국 묘지 어디서나 눈에 띄는 일본제국 군인들의 전몰비석들이 그것이다. 나이를 보면 거의 10대와 20대들이다. 그런 희생 하나하나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

이제 거대 경제대국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 일본은 25세 선생과 10대 학동의 수준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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