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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철도에 조선소까지… 한반도 침략의 3박자 입지

23 대륙침략 전진기지 히로시마(廣島)
히로시마 원폭 투하의 비극은 히로시마성에 들어온 일본군 5사단
히로시마 육군유년학교는 기숙형 교육으로 도조같은 전범들 양성
한여름 열기보다 더 뜨거운 역사의 불꽃, 그 이면에는 역사의 냉기

  • 웹출고시간2013.04.02 18:00:36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편집자 주

신영우 교수

메이지유신은 일본의 근대화를 성공시킨 세계사적인 사건이었다. 또한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은 메이지유신에서 비롯된다. 일본제국은 한 발 앞서 근대화한 군사력으로 조선과 청을 침략하면서 영토를 빼앗고 역사까지 왜곡하였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근현대 역사갈등과 영토분쟁의 원인이다.

한일 역사분쟁을 찾아가는 이 연재는 23회부터 <2부>를 시작한다. 청일전쟁은 일제의 첫 대외침략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7월 23일 새벽에 경복궁을 기습 공격했다. 이것이 첫 번째 침략이었다. <2부>에서는 국제법상 불법인 일본군의 조선 공격과 청일전쟁 그리고 동학농민혁명 관련 사건들을 정리한다.

연재는 2012년 여름 무더위 속에 찾아간 혼슈(本州)의 히로시마시와 야마구치현 그리고 시고쿠(四國)의 에히메현, 도쿠시마현, 고치현 답사기로 시작하며, 이와 함께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될 한국 내 청일전쟁과 동학농민혁명의 유적지 답사기로 계속된다.
23 대륙침략 전진기지 히로시마(廣島)

히로시마 성문

2012년 히로시마의 여름은 매우 더웠다. 거리는 온통 열기로 짓눌려서 발걸음조차 떼기 어려웠다. 도심은 포장된 길로 가득 찼고, 아스팔트는 지열로 끓어올랐다. 히로시마성의 해자와 나무는 이런 더위를 식혀줄만한 곳으로 보였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히로시마성은 한 여름 열기보다 더 뜨거운 역사의 불꽃이 일어나는 장소였고, 한 세기가 넘는 역사의 냉기가 켜켜이 서린 곳이었다.

히로시마성! 1894년 여기에 일본정부는 대본영을 설치하였다. 대본영은 전시 최고통수기관이다. 청국은 예상하지도 못한 전쟁을 메이지정부가 결정한 것이다. 히로시마 대본영은 일본군 병력을 최대한 동원해서 조선과 청에 보냈다. 대본영의 명령에 의해 조선과 청은 지금도 지워지지 않은 역사의 상처를 입혔다.

1894년 7월의 경복궁은 기습공격을 감행한 일본군에 장악되었다. 우리는 1894년 갑오년을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 그리고 청일전쟁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일본군은 먼저 조선을 공격했고, 다음에 청군을 공격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동학농민군이 봉기해서 일본군을 축출하려고 했다. 그러자 일본군은 조선정부를 강요해서 조선 관군을 앞장세워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다. 일본과 조선의 전쟁은 이 같이 기이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모든 일본군의 공격 명령을 내린 발령지는 히로시마 대본영이었다.

■ 잉어성에 들어온 히로시마 진대

히로시마성의 별명은 독특해서 잉어의 성이라고 한다. 이 지역의 옛날 이름이 잉어였기 때문이다. 폐번으로 주인을 잃은 히로시마성에는 징집령에 의해 소집된 군대가 들어왔다. 이 군대가 대일본제국 육군5사단이 되어 침략군의 선봉에 서게 된다.

이른바 제국육군의 기원은 1871년 조슈(야마구치) 사쓰마(가고시마) 토사(고치)번에서 징집한 천황 직속의 군대였다. 뒤에 근위대가 되는 이 군대의 위력으로 전국에서 번주(藩主)를 없앤 폐번치현이 이루어졌다.

1873년 메이지 군대는 6개의 진대(鎭台)를 설치했다. 도쿄 센다이 나고야 오사카 히로시마 구마모토가 군사도시가 되었다. 다음해 징병제를 전면 실시해서 사무라이 중심의 군대가 국민병제로 바뀌어졌다. 사무라이 특권도 같이 사라지자 메이지유신에 앞장선 사이고 다카모리까지 반란을 일으켰다.

진대란 이름으로 설치된 메이지정부의 군대는 사가와 구마모토의 반란 그리고 가고시마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가 되었다. 가고시마의 반란, 즉 세이난전쟁(西南戰爭) 이후 일본군은 진대란 이름을 버리고 사단 편제로 전환했다. 1888년 히로시마 진대가 5사단이 된 것이다.

5사단 사령부는 히로시마성 천수각 바로 옆에 위치했다. 이 5사단이 침략군의 첨병이 되었고, 그것이 동아시아에서 대재앙을 불러일으키는 단초였다. 1945년 원폭이 투하되는 히로시마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된다.

성문 안에 다시 해자가 있고 좁은 길을 지나야 안으로 갈 수 있다.

■ 히로시마성 밖의 육군유년학교

히로시마성은 평야지대의 낮은 언덕에 세워졌다. 나고야성과 함께 일본의 평산성을 대표하는 성이다. 넓은 해자에 물이 가득하고 천수각은 물빛과 어우러진다. 해자 둘레로 한 바퀴 돌았다. 꽤 멀었지만 걸을만한 거리였다.

해자 밖 북동쪽 모서리에 사람이 몰려있다. 시멘트로 만든 문기둥 두 쪽 옆에 안내문이 보인다. 히로시마 육군유년학교 흔적이라고 한다. 육군유년학교는 장교 양성을 위해 프러시아의 유년사관학교(카데테난스탈트, Kadettenanstalt)를 흉내 내서 주요 군사도시에 둔 것이다.

나치스 군대의 지휘관들이 카데테난스탈트 출신이었던 것처럼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와 같은 군국주의자들도 육군유년학교 출신이 많았다. 10대 초반에 입교한 교육생들은 전원 기숙사생활을 하며 엄격한 군사교육을 받은 뒤 사관학교를 거쳐 장교로 임관되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경직된 사고로 패전에 이르기까지 확전의 길만 나갔던 배경에는 육군유년학교의 교육이 있었다.

무엇을 보러 왔을까. 원폭으로 모든 교사가 파괴되고 시멘트 문기둥만 남은 흔적 앞에서 설명을 듣는 사람들은 자세가 진지하다. 위세가 당당했던 군국주의자들의 요람은 이제 관광지가 되었다.

히로시마 육군유년학교를 찾아온 관광객과 문기둥

■ 대륙침략의 전진기지 히로시마

도쿄는 전쟁터가 될 조선에서 너무 멀었다. 그래서 전진기지가 필요하였다. 조선과 가장 가까운 곳은 6사단이 배치된 규슈의 구마모토였으나 5사단이 있는 히로시마가 선정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북규슈의 사가현 나고야(名護屋)에 성을 쌓고 전진기지를 설치했다. 조선과는 최단거리의 요지였다. 전국에서 집결한 침략부대는 나고야성 일대에 주둔하며 군수물자를 쌓아두고 공격을 대기했다. 1894년에도 그런 기지가 필요했다.

왜 히로시마를 전진기지로 골랐는가. 당시 수륙 교통의 최적지였기 때문이다. 우선 대규모 병력과 군수품을 해상 수송하려면 대형선박이 들어올 항구가 있어야 했다. 히로시마 남쪽에는 우지나(宇品) 군항이 있었다.

육상 교통의 최고 방법은 철도였다. 도쿄부터 부설해온 철도가 바로 1894년 6월에 히로시마까지 연결되었다. 산요(山陽)철도의 종착지가 된 히로시마는 혼슈의 북부와 동부에서 철도를 통해 가장 빠르게 병력과 군수품을 보낼 곳이었다.

더구나 우지나항 남동쪽에 군항으로 유명한 구레(吳)가 있다. 1886년에 설치된 구레의 해군진수부(鎭守府)에는 조선소와 각종 시설이 들어찼다. 이런 배후 군사기지가 있는 히로시마는 침략의 전진기지로서 적지였다.

도쿠가와막부 시절의 히로시마성 일대 재현 모습.

■ 제5사단 사령부에 들어선 대본영

1894년 6월 조선과 청에 간 스파이들이 급보를 전해왔다. 조선정부가 청에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청병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청과 일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갑신정변 때 조선에서 후퇴한 후 10년 간 절치부심하며 군사력을 키워 자신을 가졌다.

히로시마의 5사단이 침략군으로 지정되었다. 5사단은 즉각 21연대와 22연대를 뽑아내고 포병과 기병 그리고 공병부대를 배속시킨 혼성9여단을 선발대로 급파했다. 여단장은 조슈번 출신인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1850~1926) 소장이었다. 일본군은 준장이 없기 때문에 소장은 별 하나를 의미한다.

잇달아 5사단장 노즈 미치츠라(野津道貫, 1841~1908) 중장도 사단 본부와 함께 11연대와 12연대를 이끌고 출동하였다. 우지나항에서 5사단이 떠난 후 히로시마성의 사단본부 건물에 대본영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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