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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육군, 비스마르크의 독일군 전투역량을 이식받다

40. 일본군에 이식한 독일 동원사단 편제
이와오 육군경 일행이 독일에서 군단급 야전연습을 목격
쿠르프포 등 독일의 신식 대포의 제작공정을 시찰해서 모방
독일군 클레멘스 메켈 소좌가 육군대학교 교관으로 전술 교육

  • 웹출고시간2013.07.30 18:47:54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40. 일본군에 이식한 독일 동원사단 편제

1894년 독일제국 육군의 사열식.

■ 독일의 군단급 야전훈련 참관

1884년 8월 29일 독일제국은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육군경 일행이 근위군단의 전투연습을 참관하도록 허락하였다. 이 연습은 크리스트 군단장이 지휘하고 근위보병 제1사단과 제3사단이 참가한 대규모 훈련이었다. 동군과 서군이 역할을 설정해서 공격과 방어를 맡았는데, 2개 여단과 야포연대, 그리고 기병사단과 저격병대대가 동원되었다. 공병중대와 병참중대까지 참여한 본격적인 전투훈련은 놀랄 정도였다.

기록자인 노즈 미치츠라(野津道貫) 소장은 수백 미터 전방에 포진한 보병과 포병, 그리고 기병들과 저격병의 공격 장면을 기록하였다. 또 중대 단위로 가상적의 공격을 막는 연습을 지켜보면서 야외숙영 모습까지 꼼꼼히 관찰하였다. 병사들은 각자 식품을 수령하여 조리해서 먹었고, 숙영지 주변은 바람막이를 해서 추위를 피하였다. 장교는 각자 개인 천막을 사용하였다.

흥미롭게 기술한 내용이 주보와 군악대였다. 주보는 병사들이 받은 봉급으로 음식물을 사먹도록 숙영지 근방에 두었다. 군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고 병사들이 쾌활하게 군가를 부르는 장면은 특이했던 모양이다. 근처 주민들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나와 함께 군악대 연주를 즐겼던 상황을 기록하였다.

그 보름 뒤인 1884년 9월 15일부터 며칠 동안 군단 규모로 벌어진 야전연습도 참관하였다. 독일황제와 황태자도 친람한 이 연습은 더 규모가 컸다. 남북군 대항전을 벌였는데 제8군단이 남군을 맡아 보병15사단과 16사단, 그리고 기병여단과 군단포병을 동원하였다. 북군에는 제7군단이 나와 보병13사단과 14사단 그리고 혼성기병여단이 출동하였다.

공격군은 전위와 본대, 그리고 군단포병을 앞세우고 그 다음에 사단병력이 나아갔고, 연대 단위의 지대가 요소요소에서 지원해서 작전을 벌였다. 남북군은 각기 독자 방략을 가지고 훈련을 진행하였다. 이 훈련을 참관한 사람들은 주로 유럽 대국에서 파견된 장교들이었는데 그 관전자 속에 일본군 장교 5명이 처음 포함되어 상세히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 오야마 일행의 쿠르프 무기공장 시찰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1842~1916)는 프랑스와 스위스에 유학을 하며 선진군대를 일찍 배운 인물이었다. 1870년 유럽에 파견되었을 때 보불전쟁의 실상을 목격하고, 유럽 최강으로 부상한 독일제국의 육군이 갖는 위상을 알게 되었다.

독일제국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왼쪽)과 독일군 몰트케(Helmuth von Moltke) 참모총장.

독일제국의 군대는 철혈재상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가 전력을 기울여 길러낸 군대였다. 최고의 전략가 몰트케(Helmuth von Moltke, 1800~1891) 참모총장이 이 군대를 지휘해서 1871년 파리를 점령하였고, 나폴레옹 3세(Charles Louis Napoleon Bonaparte, 1808~1873)는 결국 항복하였다. 이런 과정을 오야마가 보게 된 것이다.

오야마는 1884년 유럽 순회시 무기를 집중해서 보았다. 그는 사쓰마와 영국이 1863년에 벌인 전쟁에서 열강의 보유한 화기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대포에 관심을 가져 12cm포와 산포(四斤山砲, 4Kg 포탄 사용)를 개량하였다. 메이지초까지 주력 야전포로 사용한 미조포(彌助砲)가 그렇게 개량한 포였다.

당시 최고의 포가 영국의 암스트롱포와 독일의 쿠르프 대포였다. 오야마 일행은 에센에 있는 포탄제조창을 방문해서 해안포대와 요새 배치용 쿠르프(Krupp)포 제작 공정을 시찰하였다.

이런 시찰은 곧 일본 포병의 무기 확보와 자체 무기제작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쿠르프(Krupp)포 모습.

오야마 일행은 1884년의 독일군 야전연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일본은 바다에서 오는 위험을 막는다는 해방론(海防論)에 따라 진대를 구축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독일에서 본 훈련은 해안방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군단이 동원되어 대규모로 전개하는 공방전이었다. 그것은 독일식 전쟁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오야마는 즉각 그런 방식을 배우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일본공사 아오키 슈조((靑木周藏, 1844~1914)에게 교관 파견을 요청하도록 했다. 몰트케 참모총장은 아오키 공사에게 한 인물을 교관으로 추천하였다. 그가 클레멘스 빌헬름 야콥 메켈(Klemens Wilhelm Jacob Meckel, 1842~1906)이었다.

클레멘스 야콥 메켈.

■ 독일교관 클레멘스 메켈 소좌

조선이 일본의 침략을 받을 때 독일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독일군이 일본군을 지원한 일도 없고, 독일정부가 침략을 부추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청일전쟁 후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노골적인 야욕을 꺾는데 일조를 하였다. 그러나 침략군대 일본군은 독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본은 독일에서 육군 운영과 전투방식을 상세히 배워와서 조선침략과 청일전쟁에 그대로 응용을 하였다.

그런 독일식 전법을 가르쳐준 인물이 메켈이었고, 그를 추천한 인물이 독일군 참모총장 몰트케였다. 또한 독일군을 유럽 최강으로 육성한 사람이 비스마르크 재상이었다. 비스마르크란 역사인물이 이런 방식으로 한국사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육군대학교 교관으로 부임한 메켈 소령은 1885년부터 1888년까지 참모장교의 양성을 맡았다. 그의 교육방법과 내용은 교육생들을 압도하였다. 그동안 프랑스 고문단이 군대편제와 군사학교를 만들고 교육해온 것은 전면 수정되었다. 메켈의 이 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프랑스 고문단이 미래의 일본장교에게 부대복무를 가르쳤다면 나는 현역 참모장교로 전술 방식을 가르쳐서 보충하였다."

육군대학교 터.

메켈이 육군대학교에서 가르친 장교는 누구인가. 1기만 보더라도 면면이 놀랍다. 먼저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好古). 그는 러일전쟁의 기병1여단장, 조선주차군사령관 출신으로 대장 승진 후 교육총감을 역임했다. 이구치 쇼고(井口省吾). 그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참전한 당대 대표적인 장교로 15사단장과 조선주차군사령관을 지냈다. 도조 히데노리(東條英敎). 그는 육군대학교 수석졸업자로 러일전쟁에 여단장으로 참가했으며 군국주의의 화신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아버지로 유명하다. 나가오카 가이시(長岡外史). 그는 5시단의 혼성9여단 참모로 청일전쟁에 참가하여 성환전투와 평양전투를 정리한 책을 남겼다.

메켈은 1886년 육군 재편을 위한 위원회에서 근대 독일군의 경험에 따라 전쟁 상황을 전제한 기동력 있는 상비병 제도 확립에 기여하였다. 중대 대대 연대 사단 등 단계별로 부대를 조직하고, 보급체계와 위생시설을 갖춘 군대가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 청일전쟁은 침략전쟁의 시작

독일교관 메켈 소좌가 기여해서 일본군을 동원체제로 전환시킨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악동에게 흉기를 들려준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독일식 동원사단은 침략전쟁이 목표였다. 유럽의 강국 간 경쟁에는 적극적인 공격이 최상의 방어가 될 수 있었으나 동아시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전근대 왕조사회에 있던 조선과 청국 앞에는 서구 열강보다 더 위험한 세력이 등장한 것이었다.

오야마 일행은 유럽 열강의 전쟁준비 상황을 목격하였다. 보병과 기병 그리고 포병과 공병이 어떻게 작전을 벌이며, 사단과 군단 규모로 전투를 벌일 때 어떻게 작전을 짜고 전개하는지 독일육군의 대규모 야전연습에서 생생히 견학하였다. 동아시아에서 그런 군대가 싸울 대상은 명백하였다.

불과 몇 년 안에 독일식으로 일신한 일본군은 1894년 조선을 향해 출병하였다. 조슈번 출신 군인들이 지배했던 제국일본의 정부에선 조선침략이 당면목표였다. 요시다 쇼인에 의해 메이지유신 이전부터 세뇌되어 각인된 국가목표였다. 그래서 조선에서 변란이 일어나든 동학농민군이 봉기하든 모든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청군을 격파할 실력을 갖게 되자 침략군대의 본색이 드러났다.

이미 간첩을 파견해서 조선군의 무력함과 청군의 실태는 잘 파악했던 일본군은 일거에 청국의 요충지를 점령하고 북경까지 기습하려고 했다. 이제 조선과 청국의 국토는 신식 일본군의 전투력을 보여줄 무대에 불과했다. 근대 동아시아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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