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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의 그림이야기 - 불꽃처럼 살다간 박길웅 화백

  • 웹출고시간2025.03.13 15:01:40
  • 최종수정2025.03.13 15:01:40

박길웅 작가 작품.

이동우 미술관 서재에는 1977년 미술회관에서 열린 P(1940~1977)작가의 전시회 팜플렛 한 권이 있다. 그는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와 같이 37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불꽃처럼 사르다 떠난 비운의 화가다. 두 화가의 차이점은 고흐는 저세상에 가서라도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아는 인기작가가 되었지만, P는 국전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P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1남 3녀의 맏이로 태어나, 양복점을 운영하던 아버지 덕분에 유년 시절에는 유복한 생활을 했지만, 한국전쟁은 이중섭도 그랬던 것처럼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린다. 1·4 후퇴 때 부친이 병사하고, 어머니마저 병을 얻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의지할 곳이 없어진 P와 누이는 고아원을 전전해야 했다. 열악한 환경의 고아원 생활을 견디지 못한 P는 누이와 함께 탈출해 안성에 사는 이모를 찾아간다. 그러나 이모 집에서도 오래 머물 형편이 안돼, 다시 고아원에 맡겨지는 등 그야말로 가시밭길 어린 시절을 보냈다.

P가 그림에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그 시절이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고학으로 안성농고를 졸업했지만 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P는 산과 들로 방황하며 그림을 그렸고, 마침내 안성에서 개인전을 열게 된다. P는 전시회를 끝낸 후, 자신의 갈 길은 그림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기 위해 서라벌예술대학에 문을 두드린다. 2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1965년 홍익대 회화과 3학년에 편입하여 그림공부를 지속한다. 1953년 개교하여 1972년 폐교된 서라벌예술대학은 나중에 중앙대학교 예술대학과 합병이 된다.

그 당시 구상미술 위주의 한국화단에서 한국추상미술의 개척자를 자처하던 P가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된 계기가 있었다. 바로 1969년 제18회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흔적 白F-75' 작품이 대통령상을 받은 것이었다.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은 추상화로써는 최초의 일이었다. 심사위원이었던 남관은 "비로소 비구상 부분의 작품이 최고 수상작품이 됨으로써 한국화단의 새로운 방향이 제시되었고, 한국미술의 흐름이 세계미술의 흐름에 발맞출 수 있게 되었다."며 호평하였다. 또한 이마동 교수는 "경향이 퍽 새롭고 기교면에서 특출한 작품으로, 이번 국전의 최대의 수확이라 할 수 있겠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야말로 P는 한국 화단에 샛별처럼 떠오른 것이다.

박길웅 작가 작품.

우후죽순처럼 많았던 공모전이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몇 개 남은 공모전은 취미생들 데뷔 무대로 전락했지만, 예전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국전에서 특선만 해도 '국전 특선작가'라는 타이틀을 평생 달고 제법 작품을 팔 수 있었고, 지방대학 미술과 교수 직책도 꿰찰 수 있었다. 어느 모 작가는 국전 이후 생긴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주어지는 병역면제 혜택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P는 화가로서 최고의 영예를 얻어 그림을 고가에 팔 수 있었음에도, 이를 끝내 마다하고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예상치 못한 대통령상을 받은 후 더 이상 국전에는 작품을 출품하지 않고 개인전에만 몰두한다. 대통령상으로 뽑아준 심사위원들이 스승들이었던 점이 크게 부담된 듯하다. 이후 P는 대통령상 특전으로 주어진 해외연수로 미국에 가서 판화를 공부하며, 뉴욕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인생의 짧은 전성기를 맞는다. 그러나 병역 문제로 1972년 귀국해야 했고, 한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시 가난, 외로움과 방황뿐이었다.

그러던 중 새 출발을 하고 싶었던 그는 미국에서 만난 최순덕과 1972년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일장춘몽이었다. 어느 날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한 뒤 사소한 일로 말다툼이 시작되었고, 갑자기 최순덕은 "죽음으로 결백을 증명해 보이겠다."며 아파트 창문으로 투신한다. 결혼식을 올린 지 겨우 20일 만의 일이었다. 이 사건은 이후 각종 일간지들에 보도되면서 많은 구설수가 P를 난처하게 만들었고, 결국 심한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거기다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어머니가 작품 제작하라고 집까지 팔아 지원해주었기에 이제 더 이상 도움받을 곳도 없어졌다. 급기야 애지중지하던 니콘카메라까지 팔아버렸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그는 상업주의와 타협하지 않겠다며 작품을 절대 팔지 않고 버텼고, 끼니는 걸러도 물감은 최고급만을 고집하였다. 생활비는 미술대학 시간강사를 하면서 겨우겨우 충당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이 계속되던 중 천사가 나타난다. 과거에 판화를 배웠고 당시 중학교 미술 교사 생활을 하던 박경란(1949~ )이었다. 둘 사이는 점차 사제지간에서 연인관계로 발전해 결혼에 골인한다.

P는 생활이 안정되면서 새로운 작품으로 1972년 5번째 개인전을 준비한다. 이 전시에서 P는 한국에서 전무후무한 초대형 설치미술 작품을 선보인다. '낮과 밤'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높이 4m, 길이 100m의 초대형그림이었다. 이 전시를 통해 작가적 스케일과 조형세계를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 설치 작품은 파격성과 미술사적 가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난을 겪게 된다. 워낙 거대했던 탓에 제대로 보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전시가 끝난 뒤 일부는 무대에 설치한다고 연극하는 친구가 가져갔다. 나머지는 작업실에 보관했지만, 추위를 달래기 위해 작품의 천을 바닥에 깔았는데, 시간이 흐르며 다 망가져 버렸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사진으로만 작품을 볼 수 있다.

P가 본인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그의 외골수 성격 때문이었다. '예술의 소재는 항상 변하고 작가는 시대를 앞서가야 한다. 예술가에게 적당히란 없는 법이다.'라는 것을 신조로 살았다. 거친 성장환경을 통해 굳어져 버린 그의 성격은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는 아웃사이더, 외톨이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언제나 비타협적이었고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 댓가로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을 묵묵히 견뎌야만 했다.

이동우

미술관장·화가

필자는 초등학교 때 TV 드라마를 통해 P작가의 삶을 접한 적이 있다. 오래전 본 것이라 출연 배우와 줄거리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주인공인 괴팍한 화가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미술 교사인 부인의 수입에 의존해 그림을 그리며 살아가는 주제에 부인을 어렵게 하는 화가였으며, 미술과 시간강사를 하면서 수업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학생들에게 강의실에서 나가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불꽃처럼 살던 P작가는 하늘나라에서 올라오라는 부름을 일찍 받는다. 간암으로 인해 37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것이다. 갑작스런 죽음이라 안타까움이 더했다. 아내 박경란은 그의 유작 중 대작 80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였다. 1,000여점의 작품은 모기업 미술관 수장고에서 세상의 빛을 기다리고 있다. 박경란은 '아직도 내 사랑 끝나지 않았네'라는 책을 써 야속하게 일찍 떠난 남편 P를 그리기도 했다. 딸 박승리는 미국 시카고 미술대학을 나와 미국에서 작가로 활동하면서 아버지 뒤를 잇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살아있을 때 단 1점의 그림밖에 못 팔았을 정도로 무명화가로 어렵게 살았다. 착한 동생 테오가 보내주는 생활비로 근근히 살다가 37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은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을까· 그것은 동생 테오 부인 요한나의 탁월한 스타작가 만들기 능력 덕분이다. 고흐가 죽자 화상이었던 동생 테오도 바로 형의 뒤를 따른다.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이 없는 고흐의 수 많은 작품을 요한나가 관리하게 된다. 요한나는 체계적인 홍보전략으로 아주버님 고흐의 작품들을 세상에 알려, 고흐를 세계적인 화가로 변신시킨다. 그녀가 없었다면 고흐는 영원히 무명화가로 잊혀지고 말았을 것이다.

P는 고흐 못지않게 전설, 신화, 요절이라는 예술가로 대성할 수 있는 요소를 다 갖춘 작가이다. 거기다 국전 대통령상을 받을 정도로 작품성도 인정받은 작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뿐만 아니라 그림을 전공한 미술인들에게도 생소한 이름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주변에 요한나와 같은 능력을 갖춘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래만 잘한다고 유명가수가 되는 것이 아니듯, 그림만 열심히 그리면 유명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화가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파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업주의와 결탁한 그룹에 의해 유명 예술인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부인하기 어렵다. 트로트 경연프로그램을 통해 무명가수들이 대형가수로 변신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는 요즘이다. 지금 우리 시대가 전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전업 작가로 살아가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고 안타까울 뿐이다. 대한민국 전업 작가들이 빵을 걱정하지 않으며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고, 'P 미술관'이 건립되어 P의 작품들이 빛을 볼 날을 학수고대해 본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P는 불꽃처럼 살다가 사라진 박길웅(朴吉雄, 1940~1977) 화백이다. 25년 후배 화가는 그의 이름으로 3행시를 지어 그를 그리고자 한다.

박(朴) : 박길웅 화백의 삶은

길(吉) : 길이 아닌 고난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그것은

웅(雄) : 웅비(雄飛)하기 위한 한 예술가의 처절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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