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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의 '그림이야기' - 화가 이중섭과 시인 구상, 그리고 천도복숭아

  • 웹출고시간2024.05.01 16:14:01
  • 최종수정2024.05.01 16:14:01

지난 2016년 서울 중구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이중섭의 개인전' 관람객이 이중섭 화가의 자화상을 감상하고 있다.

ⓒ 뉴시스
예술가로 알려지려면 신화와 전설이 있고, 요절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 세 가지를 갖춘 대표적인 화가가 우리나라의 이중섭이고 서양에는 빈센트 반 고흐가 있다. 고흐는 동생 테오의 도움으로 생활비와 그림 재료비를 충당했고, 이중섭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눈물을 머금고 처와 아들 둘을 일본 처가에 보내고, 만나지 못하고 그리워만 하다가 눈을 감는다. 두 화가의 그림들은 사후 수십억, 수백억에 거래되는 블루칩 작가가 됐고 영화, 소설, 평전 등이 많이 나와 있어 그들의 일대기는 줄줄 읊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오늘은 이중섭의 일대기와 작품세계를 논하는 것은 별 흥미가 없을 것 같아, 그나마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시인 구상과의 우정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말이 있다.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사귐이란 뜻으로, 우정이 아주 돈독한 친구 관계를 말한다. 시인 구상과 화가 이중섭의 관계는 관포지교라 할 정도로 돈독했다.

이중섭은 1916년생이고, 구상은 1919년생으로 3살 차이가 났지만 둘은 격의 없는 친구 사이로 지냈다. 이중섭은 어려운 순간마다 구상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 구상의 부인은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였고 구상도 신문사에 근무했기에 경제적으로 풍족해 많은 예술가들에게 도움을 줬는데 그 중에 한 명이 이중섭이었다. 이중섭은 신혼의 단꿈을 꾸던 원산 시절부터 구상을 통해 많은 문우들을 알게 됐으며, 부산 피난 시절에는 미리 월남해 대구로 내려와 있던 구상을 만나 그에게 의지하기도 했다. 처자식을 일본으로 보낸 후 고독감과 싸우던 때도 그의 곁에는 구상이 있었다. 가난 속에서 병고에 허덕이면서 죽음의 문턱에 서 있던 그를 적십자 병원으로 옮겨준 것도 구상이었다고 한다. 그의 주검을 수습해 일본 동경의 가족들과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한 것도 구상이었다.

이중섭, 바닷가의 아이들, 종이에 연필, 유채, 32.5x49, 1952.

ⓒ 뉴시스
이중섭과 구상이 어떤 사이였나 알 수 있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구상이 폐결핵으로 폐 절단 수술을 받았는데, 구상은 절친인 이중섭이 꼭 찾아와 주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평소 이중섭보다 교류가 적었던 지인들도 병문안을 와 주었는데 유독 이중섭만 나타나지 않았다. 구상은 기다리다 못해 섭섭한 마음마저 들던 것이 나중에는 이 친구에게 무슨 사고라고 생긴 것이 아닌가, 걱정이 들 지경이었다. 뒤늦게 이중섭이 찾아왔는데 심술이 난 구상은 반가운 마음을 감추고 짐짓 부아가 난 듯 말했다.

"자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그 누구보다 자네가 제일 먼저 달려올 줄 알았네. 내가 얼마나 자네를 기다렸는지 아나?"

그러자 이중섭은 "자네한테 정말 미안하게 됐네, 빈손으로 올 수가 없어서…"라며 꾸러미를 내밀었다고 한다. 풀어보니 천도복숭아 그림이 있었다고 한다.

"어른들 말씀이 천도복숭아를 먹으면 무병장수한다지 않던가, 그러니 자네도 이걸 먹고 어서 일어나게"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누군가에 의해 각색된 것이고, 사실은 구상이 비의(秘義)라는 제목으로 그 당시 상황을 쓴 글이 남아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향우 이중섭이 이승을 달랑달랑 다할 무렵이었다. 나는 그때도 검은 장밋빛 피를 몇 양푼이나 토하고 시신처럼 가만히 누워 지내야만 했다. 하루는 불쑥 나타나서 애들 도화지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애호박만큼 큰 복숭아 한 개가 그려져 있고 그 한가운데 씨 대신 죄그만 머슴애가 기차를 향해 만세를 부르는 그런 시늉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받으며 "이건 또 자네의 바보짓인가? 도깨비놀음인가?"하고 픽 웃었더니 그도 따라 씩 웃으며 "복숭아, 천도복숭아, 님자 상(常)이, 우리 구상이 이걸 먹고 어이 빨리 나으란 그 말씀이지." 흥얼거리더니 휙 돌쳐 나갔다.

위 두 글을 보면 두 사람이 어떤 관계였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가난한 화가 친구는 병상에 누워있는 친구를 찾아가면서 한 알의 복숭아도 살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도화지에 천도복숭아를 그려 전달하고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다. 평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친구에게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고 얼굴 대하기가 민망했을 것이다.

이중섭,복사꽃 가지에 앉은 새, 종이에 유채,54.5 x 37cm, 1955년경.

ⓒ 뉴시스
1956년 이중섭이 세상을 뜨고 구상은 1957년 9월 동경에서 열리는 국제 PEN대회에 참석하러 일본을 갔을 때, 일본 하네다 공항 커피숍에서 상복을 입은 이중섭의 처(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 흰 보자기 상자를 건네며 "세상을 떠났을 때 화장을 해서 뼈의 일부는 무덤을 짓고, 일부는 어느 때건 전해드릴 날이 있을 것 같아 제가 간수하다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무덤의 사진이고요"라고 했다고 한다.

구상은 2004년 임종을 앞둔 반 혼수상태에서도 48년 전 먼저 세상을 뜬 친구 중섭을 찾을 만큼 많이 그리워했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친구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천도복숭아' 그림을 서재에 걸어 두고 친구를 그리워하며 평생을 함께했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권영민은 "이중섭에게 있어서 시인 구상은 인간적 우의를 지킨 친구였고 동시대 삶의 고통 속에서 그 순수예술의 지향을 함께 했던 정신적 동반자였다. 두 사람은 비록 미술과 문학이라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했지만, 각자의 예술적 지향을 하나의 특이한 개성으로 지켜냈다. 그러므로 이중섭은 이중섭대로 구상은 구상의 방식대로 자기 예술의 큰 세계를 만들어 내면서 그들이 만든 신화 속에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두 사람의 우정을 말하고 있다.

오늘따라 유난히 푸른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관포지교와 같은 변함없는 우정을 나누고 있을 것만 같다.

이동우

미술관장·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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