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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의 그림이야기 - 우리 문화재 덕후 간송 전형필

  • 웹출고시간2025.03.06 17:00:14
  • 최종수정2025.03.06 17:00:13

대구간송미술관

S그룹 창업주 L 회장(1910~1987)과 H그룹 창업주 J 회장(1915~2001)이 저승에서 만나 경제인 모임을 한 후, J 회장이 L 회장에게 " 형님 자판기 커피 뽑아 먹게 동전 가지고 계신 것 있으시면 300원만 주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L 회장은" 아우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 이곳에 올 때 동전 한닢 못 가지고 왔어"라고 대답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리고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죽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재산을 많이 일군 재력가들은 그 재산을 정리하는 방법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자식들에게 모두 상속하는 형인데, 재산을 적게 받았다고 불만을 갖은 자식이 소송을 걸어 형제간 분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두 번째,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형인데, 직원들에게 회사 주식을 아낌없이 나눠준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와 아기를 낳은 직원들에게 1억원씩, 어릴 때 친구들과 자랄 때 도움을 준 이웃 사람들에게 거금을 아낌없이 나눠준 부영그룹 이중근 회장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세 번째, 국가나 사회단체, 학교 등에 깔끔하게 기부하는 형이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 위 세 가지 유형에 속하지 않는 방법으로,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물 쓰듯 탕진(?)한 큰손이 있다. 그의 이름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1906~1962)이다. 간송은 1906년 서울 종로구에서 전영기의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그의 집안은 증조 때부터 종로4가 중심 상권을 장악한 10만 석 대부호 가문이였다. 작은아버지 전명기가 후손을 얻지 못하자, 전형필은 당시의 관례에 따라 작은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학창시절에는 외 사촌 형 월탄 박종화(문인,1901~1981)와 교류하는데,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아 국문학을 전공하고자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26년에 월탄이 다닌 휘문고보를 졸업한 후 "나라 잃은 백성을 도와주는 변호사가 되어라"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와세다 대학 법학부에 진학한다. 양부인 작은아버지가 사망하고, 생부 전영기마저 사망하자, 가문의 많은 재산을 단독으로 상속받아 23세의 젊은 나이에 백만장자가 된다. 그가 상속받은 부동산 중에 논의 면적만 무려 800만 평이 넘었는데, 이는 여의도 면적의 약 10배 크기라 한다. 그 밖에도 밭과 상가, 상권 등 많은 것을 물려받았다. 당시 서울의 기와집 2,000채에 해당하는 재산이었다.
그 당시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은 비행기를 사 일본에 헌납하는 친일행위를 하거나, 고급술집을 전전하며 주색잡기로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는 부류가 많았는데, 간송은 나라를 빼앗긴 일제강점기에 언젠가는 조국이 반드시 독립하리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그 많은 재산을 팔아 우리 민족의 문화와 정신을 말살하려는 일제에 맞서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것이다. 이는 개인적인 영광이나 취미를 목적으로 한, 대부분의 유물 수집가들과는 차원이 다른, 민족 문화의 수호자로서의 구도자의 길을 걸은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간송이 이렇게 통 큰 행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1886~1965)과 위창 오세창(1864~1953)의 영향이 컸다. 간송은 춘곡 고희동을 휘문고보에서 미술 선생님과 학생 사이로 만난다. 그리고 춘곡의 소개로 당대 최고의 금석학자이자 예술품에 대한 뛰어난 감식안을 가진 위창을 만나게 되는데, 그로부터 간송은 문화재에 대한 미감과 안목, 예술품에 담긴 민족의 고고한 정신과 그 가치를 배우게 된다. 23세의 간송과 43세의 춘곡, 65세의 위창이 만난 것은 한국 미술사의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이들이 만나지 않았다면 간송미술관은 존재하지 않았고, '진경시대(眞景時代)','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는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용어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석사학위 논문으로 단원 김홍도 진경산수화를 연구해 쓰기도 했다.

간송이 수집한 문화재의 양은 개인이 수집했다고 하기에는 미끼지 않을 정도로 방대하다. 중요한 유물로는 세종 때 인쇄된 우리글의 제작원리와 우수성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인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20호), 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 고려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 등 12점의 국보와 10점의 국가 보물, 4점의 서울시 유형 문화재 등이다. '고려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2만원에 구입했는데, 1930년대 경성(서울시)에 좋은 기와집이 1000원 정도 했다고 하니, 20채에 해당하는 거금인 것이다. 지금 싯가로 기와집 한 채를 10억 정도로 본다면 20채는 200억이 넘는 거금인 것이다. 간송미술관 소장품만으로 한국 미술사를 서술할 수 있으며, 이를 제외한 한국회화사는 상상할 수 없다고 보는 학자가 있을 정도이다. 간송이 혼신의 힘을 다해 지켜낸 우리 문화재들은 1965년 세워진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한다. 연구에 올인하기 위해 결혼하는 것을 포기한 최완수 미술사학자를 중심으로 연구진들은 우리 고유의 문화가 가진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연구하여 알렸으며, 특히 조선 후기 숙종부터 정조에 이르는 120여 년 동안의 문화절정기를 "진경시대(眞景時代)"라 명명하기도 한다.

간송미술관은 이렇게 연구중심 미술관으로 운영하다 보니 봄, 가을에 보름 정도만 개방해 일반인들이 유물보기가 어려웠다. '바람의 화원'이라는 드라마에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가 소개된 후, 이 그림을 보기 위해 200m의 줄을 서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하는데, 작년 대구에 상설전시공간인 '대구간송미술관'이 개관을 해 간송미술관 소장유물들을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몇 년 전 대구지역을 여행하다가 '대구미술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미술관 옆에 멋진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공사안내판을 보니 '대구간송미술관'이라는 반가운 이름을 본적이 있다. 간송이 남다른 점은· 누군가 골동품을 팔려고 오면 절대로 깎는 법이 없었고, 1만원 가치가 있는 것을 5천원 부르면, 만원을 채워 줬다고 한다. 또한 훈민정음 해례본을 1만원에 구입하면서 중간에서 소개한 사람에게는 수고비로 1000원을 줄 정도로 통이 컸다. 이러한 간송의 돈을 아끼지 않는 우리 문화재 사랑이 전국에 소문이 나자, 좋은 골동품이 나오면 제일 먼저 간송에게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래서 간송은 수준 높은 문화재를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간송미술관 수장품들은 최대위기를 맞는다.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하자마자, 간송미술관의 수장품을 북으로 가지고 가기 위해 들이닥쳤다. 간송은 수장품들을 두고 피난할 수 없어, 일단 가족들은 외가에 피난을 시키고, 본인은 미술관 부근에 몸을 숨기며, 수장품들을 포장작업에 강제로 차출된 혜곡 최순우(1916~1984,국립중앙박물관장 역임)와 일본에 가 추사의 '세한도'를 찾아온 소전 손재형(서예가,정치가1902~1981)과 내통하면서 포장작업을 지연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손재형이 일부러 계단에서 굴러, 다리를 다쳐가면서까지 시간을 끄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어 미술관의 수장품 들을 지킬 수 있었다. 1.4후퇴 때에는 눈물을 머금면서 수 만권의 고서와 여타문화재들은 하늘에 뜻에 맡겨버리고, 가장 중요한 문화재들만 골라, 정부에서 내어준 열차에 싣고 부산으로 피난 갈 수 밖에 없었다. 창고를 대여하여 가지고 내려 온 수장품들을 보관하며, 전성우, 전영우 두 아들들에게 직접 지키도록 하고, '훈민정음 해례본'과 '동국정운' 등은 간송 본인이 직접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말년에 간송은 그 많던 재산은 문화재들을 구입하고, 경영난으로 폐교위기에 있던 보성중학교를 60여만원의 거금을 주고 인수하느냐고 다 써 버린다. 세월이 흘려 특별한 수입원이 없는 간송미술관은 경영난 악화로 소장 중인 불교 관련 국보2점이 경매에 나올 정도로 심각해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찰된 것을 30억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사 들인다. 간송의 문화재 사랑은 독립투사들의 애국심 못지않다. 안락한 생활이 약속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가지 않고, 무모(?)하게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 전형필! 그의 숭고한 뜻은 바다와 같이 넓고 깊다. 2025년 겨울, 59년 후배 화가는 그의 이름으로 3행시를 지으며, 그의 정신을 본 받고자 한다.

전 - 전무후무한 선생님의 발자취를 살펴 보면

형 -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물밀 듯 밀려 옵니다. 저도 선생님의 뒤를 이어

필 - 필마(匹馬)처럼 달려 볼까 합니다.

이동우

미술관장·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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