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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의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이동우의 그림이야기

  • 웹출고시간2022.09.15 17:19:21
  • 최종수정2022.09.17 13:46:33

표훈사

예술은 평범하지 않다. 평범한 작품으로는 보는 이에게 감동을 줄 수가 없다.

이렇게 평범하지 않은 작품을 만들려고 하니 예술가의 삶도 평범하지 않다. 평범하게 살아서는 평범한 작품만 만들 수 있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인지 예술가들은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인기 연예인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듯이, 예술가의 작품보다는 그 예술가의 기행과 처절하게 산 삶에 관심을 두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예술가가 되려면 요절해야 하고, 신화와 전설이 있어야 된다는 얘기도 있다. 상품적으로 가치있는 작가를 키우는 화랑이나 기획사에서는 이 세 가지를 적절히 부각시켜 작품가격을 올리는 전략으로 구사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평범하지 않게 산 작가 중 대표적인 사람이 호생관 최북(崔北,1712~1786)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자 북(北)을 둘로 나누어 칠칠(七七)이라고 했다. '칠칠치 못한 놈'이라고 자기를 비하한 셈이다. 말년에는 '붓으로 먹고 산다'는 뜻의 호생관(毫生館)이란 호를 사용한다.

우리는 영화, 책자를 통해 자기 귀를 자른 빈센트 반 고흐는 잘 알아도 자기 눈을 찌른 호생관 최북은 잘 모른다. 그는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한국의 고흐'라고도 불리는데 개성 넘치는 그림만큼이나 괴짜로도 유명하다.

어떤 양반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자, 최북은 그가 맘에 들지 않아 요청을 거절했고, 양반이 화가 나서 그를 협박하자 "니놈에게 그림을 그려주느니 장님으로 사는 게 낫다"라며 나뭇가지로 자신의 오른쪽 눈을 찔러 스스로 애꾸눈이 되었다고 한다.

벼슬아치의 위협을 힘으로 맞설 수 없는 최북은 화가가 가장 아껴야 할 눈을 스스로 찌른 것이다. 밖으로 향할 수 없는 분노를 안으로 터뜨린 것이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겠다는 예술가의 자존심을 엿 볼 수 있는 일화이다.

또 그는 그림값으로 돈을 덜 주면 그림을 찢어버렸고, 작품이 좋지 않은데 그림값을 더 주면 상대를 조롱하고 쫓아내 버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기분이 좋으면 술 한 잔에도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다.

최북은 취화선 장승업 못지않게 술을 좋아했다. 항상 취한 채로 그림을 그렸고 괴팍한 성격 때문에 대인관계가 좋지 못했다. 돈을 벌어도 술값으로 전부 쓰다 보니 그림이 팔려도 가난을 면치 못했다. 그는 돈은 없었지만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한 번은 금강산 구룡연을 구경하고 흥분하여 술을 잔뜩 마시고는 "천하 명인 최북은 천하 명산에서 마땅히 죽어야 한다"라며 물속으로 뛰어들기도 한다.

풍설야귀인

이번에 소개할 그림은 최북의 그림 중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이다.

'눈보라치는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날카롭게 꺾인 산세와 성긴 나무들은 이곳이 아주 깊은 산속임을 알려준다. 험준한 산 아래 나무들이 바람에 꺾일 듯 휘어져 있고 허물어질 듯한 울타리와 그 안쪽으로 초가집이 한 채가 있다.

초가의 대충 얼기설기 엮은 사립문 앞으로 검둥개 한 마리가 사납게 짖고 있는데, 그 앞으로 지팡이를 짚고 등이 굽은 선비가 아이를 데리고 눈보라 속을 걸어가는 그 뒷모습이 매우 고단해 보인다. 평생 어디 한 곳 정착하지 않고 뜬구름처럼 떠다닌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눈에 봐도 매우 거칠고 빠르게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구도를 생각하고 신중히 계산하여 그린 그림이기보다는 마치 무엇인가 홀린 듯이 단숨에 그린 것 같다.

이 그림이 거칠게 느껴지는 이유는 붓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그린 지두화(指頭畵)이기 때문이다. 지두화는 지화(指畵), 지묵(指墨)이라고도 하는데 손가락이나 손톱 끝에 먹물을 묻혀서 그린 그림을 말하며 간혹 손등과 손바닥을 사용하기도 한다. 서양의 핑거페인팅(finger painting)기법과 비슷한 것이다. 지두화는 붓으로 그린 것에 비하여 날카롭게 그어지는 독특한 효과 때문에 붓으로 그린 그림보다 훨씬 표현력이 강할 수 있다. 최북은 이런 지두화의 강점을 잘 알고 있는 화가였고 그림에서도 바람에 꺾여 휘어지는 나무 표현에서 그 효과가 여실히 드러난다. 아마 붓으로 표현했다면 나뭇가지를 휘어 버릴 만큼 강한 눈보라의 느낌이 반감되었을 것이다.
최북의 최후는 쓸쓸하기 그지없다. 눈보라 치는 밤 열흘이나 굶다 간신히 그림 하나를 판 돈으로 술을 대취할 정도로 마시고 성 밖에 쓰러져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풍설야귀인'에 나오는 선비처럼 눈보라를 맞으며 돌아올 수 없는 겨울 산을 향해 걸어간 것이다.

그는 늘 가난한 삶이었지만, 자유롭고 개성 넘치는 삶을 살았고, 그의 그림들은 그런 정신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북의 고향 전라북도 무주군에서는 '최북미술관'을 지어 그의 예술정신을 되살리고 있다.

이동우

충북미술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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