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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우의 '그림이야기' - 비운의 조각가 권진규

고독 속 영원을 빚은 '불꽃 같은 조각가'

  • 웹출고시간2022.11.03 17:34:45
  • 최종수정2022.11.03 17:35:17
[충북일보] 우리나라에서 안타깝게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수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그들이 부른 노래가 흥겹지 않고 슬픈 노래라는 것이다.

전 국민이 좋아하는 히트곡이 되려면 수만 번을 불러야 하는데, 많이 부르다 보면 시나브로 자기도 모르게 맘이 우울해지고, 그 증상이 심해지면 결국 목숨을 끊는 일까지 생긴다는 것이다.

미술가 중에서도 가장 순수한 영혼의 모습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는 영원성을 느낄수 있는 어두운 풍의 작업을 하다가 안타깝게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작가가 있다.

그의 이름은 조각가 권진규이다.

그의 인물상 작품들을 보면 흔들림 없이 뜨고 있는 눈은 본질을 꿰뚫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생생한 눈빛을 통해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동시에 어떤 것을 갈구하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973년 5월 4일 오전 고려대학교 박물관을 방문해 전시돼 있는 자신의 작품들을 둘러보고, 동선동 작업실로 돌아와 몇 명의 지인들에 편지를 쓴다. 누이동생 권경숙 앞으로는 "자신의 아이(작품)들을 잘 부탁한다"는 부탁의 유서와 30만 원을 남긴다. 그리고 오후 3시, 그가 직접 짓고 예술 혼을 불태운 작업실에서 세상과 이별한다.

그때 그의 나이는 만 51살이었다.

그는 192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유학해 무사시노 미술학교에서 조각을 공부했는데, 그가 다닌 미술학교는 일본 국립 도쿄예술대학과 차별화되는 자유로운 분위기의 명문사립 미술학교로 한국 유학생이 많은 게 특징이다. 이곳을 졸업한 미술가는 140여 명으로 이쾌대·이유태·장욱진·주경·전수천·박고석·김창억 등 한국 미술사에 족적을 남긴 기라성같은 작가들이다.

2009년 개교 80주년을 맞는 무사시노미술대학은 이곳 출신 예술가 중 대표적인 인물 한 사람을 정해 개인전을 열기로 하고,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60년 전 이 대학에서 유학한 한국 조각가 권진규의 작품 슬라이드를 넘겨보며 교수들은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스승 시미즈 다카시(淸水多嘉示·1897∼1987)를 넘어섰다." "독특한 개성이 잘 살아 있다." "이 정도면 한국 뿐 아니라 일본의 근대 조각사에도 권진규를 위한 자리를 내줘야 한다"고 극찬을 했으며 한국, 일본 국립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 정도로 권진규는 실력있는 조각가였다.

‘지원의 얼굴’ 1967년작

권진규는 사랑하는 부인 오기노도모(1931~2014)을 모델로 여러 점을 남겼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권진규는 전문모델보다는 주변 인물들을 많이 모델로 삼아 작품을 제작한다. 그 예로 중·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지원의 얼굴(1967년작)'이라는 권진규의 대표작이 있는데, 이 작품도 우리나라 화단의 대표여류작가인 장지원 화백(77)이 홍익대학교 2학년 학생일 때, 권진규가 홍익대 시간강사로 있던 인연으로 모델로 돼 만들어진 작품이다. 부군인 구자승 서양화가와 충주에 작업실을 짓고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장지원 화백을 몇 년 전 수안보 '정봉기(조각가)갤러리' 오픈하는 날 본 적이 있는데 70대 중반 원로화가의 얼굴에서 50여년전 '지원의 얼굴'을 찾아보려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다.

권진규와 도모가 처음 만난 것은 1951년으로 실기 수업을 같이 받으며 알게 된 서양화과 학생 도모에게 모델을 부탁하면서 부터이다. 인물상을 제작하면서 모델과 작가는 사랑이 싹트게 된다.

도모는 진규보다 아홉살 연하의 짧은 머리 숙녀였다. 이후 8년여간 행복한 부부로 지내다 1959년 권진규는 홀로된 노모를 부양하고 예술가로서의 욕구 때문에 홀로 한국으로 돌아온다.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라 그는 도모와 함께 귀국할 수 없었다. 일본을 떠나기 전 그들은 미뤘던 혼인신고를 하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지만,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귀국해보니 경제적 여건이 기대보다 훨씬 열악했다. 함흥에서 열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부자였지만, 남북이 갈리면서 많은 재산을 북에 두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은사(시미즈 다카시)의 은사인 부르델처럼 부자 조각가가 되자. 당당하게 성공하여 도모와 재회하자"는 꿈을 꿔 보지만 수입은 몇 군데 대학 시간강사 수당이 전부였다.

도모에게는 너무 미안해 권진규는 편지를 못한다. 이것이 문제가 됐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는 사위에게 일본 처가에서는 이혼서류를 보내온다. 이로 인해 1965년 도모와 법적으로 남남이 된다. 후에 '권진규 일본전시회'에서 짧은 만남을 갖지만 도모는 "바보! 바보!" 라는 말만 연발했다는 슬픈 얘기가 전해진다. 이미 도모는 다른 남자와 재혼한 상태였던 것이다.

"성공한 조각가로 도모와 재회하리라"

권진규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권진규의 자소상'과 '도모 인물상'은 누이동생 권경숙의 노력으로 작품으로나마 만나게 된다.

도모가 세상을 뜬 후, 권경숙은 일본으로 건너가 도모의 남편을 만나 '도모'인물상을 비롯한 권진규의 작품들을 구입해 온다. 권진규기념사업회와 유족들은 2021년에 141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함으로써 고인의 유언을 지킨다.

권진규의 삶을 보면 북한지역 부잣집 아들, 일본으로 유학 가 같은 미술학교에서 배우자를 만난 것, 남북이 갈리면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았고 그 이유로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진 점 등이 이중섭과 많이 비슷하다.

"빵을 해결하지 못한 예술가의 삶은 비극으로 끝난다."는 점이 많이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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