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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광호

청석고 교사

내 어린 시절, 청주에서 유일하게 야구부가 있었던 고교는 세광고등학교였다. 대성동과 탑동 어름에 존재했던 학교 운동장에선 오후 수업이 끝난 야구부원들의 연습이 동네 주민들의 눈과 귀를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소일거리나 구경거리가 흔치 않던 그 시절에, '나이스 볼!' 이니 '나이스 캐취!', '마이 볼!', '피처 좋다, 피처 좋아!' 하는 소리도 신선했고, '고고고고 고(백)!'하고 도루(盜壘)를 재촉하거나 만류하는 코치의 고함소리에 스파이크 뒤꿈치로 그라운드의 흙을 퍼 올리며 달아나는 모습도 즐거웠다.

그 무렵 진천 사석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병사들이 야구의 나라 백성들답게 주말이나 일요일이면 친선게임을 하러 오곤 했다. 선수들은 백인과 흑인 혼성팀이었는데 어린 우리들에게 그들의 모습은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볼거리였다. 키가 크고 덩치가 우람한데다가 코가 높고, 눈이 신비스럽게도 파란 것은 흰둥이들이었다. 엄청 강인해 보이긴 하지만 입술이 두꺼워선지 미개인처럼 여겨지고, 시커먼 얼굴에 하얀 눈이 비수처럼 번뜩이는 건 껌둥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6·25 때 우리나라를 구해 준 나라 미국이라는 무조건적인 존경과 사랑 때문에 우리에겐 아이언맨이나 배트맨과 다름없어 보였다.

어쨌거나 주말이면 인근 동네 어른과 조무래기들이 운동장에 모여들어 그들의 출현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던 것이다. 그들은 또 시혜적(施惠的) 입장에 선 자들답게 여유 있는 미소와 너그러움을 한껏 뽐냈다. 쓰리쿼터라는 작은 적재함이 있는 차 뒤에 몇 명의 미군이 서서 손가락 키스도 날리고 그것들보다 더 현실적이고 달콤한 것들, 초콜릿이며 껌, 사탕 등을 아귀처럼 집요하게 따라붙는 우리들을 향해 뿌려주었다. 먹을 거 귀하던 그 시절에 미제 사탕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횡재였고 자랑거리였다. 그때 우리가 잽싸게 배우고 목청이 터지라고 외쳐댔던 말은 그야말로 눈물겨운 언어의 조각들이었다. '헬로, 기브 미 껌!', '기브 미 쪼꼬렛!'

그러나 동작이 굼뜬 내게 기적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들 어찌 그리도 잽싼지 매가 병아리 채가듯 하는 현장에서 나는 매번 민망한 내 손을 거두어들여야만 했다. 그런데 초콜릿과 껌을 포기하고 멀어져가는 미군 병사들의 손을 씁쓸하게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던 내 눈이 먹을 것을 던지는 손이 아닌 또 다른 손을 보았다. 카키색 제복에 게리슨 캡을 갸웃이 쓴 군인이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대고 있었다.

나는 그가 카메라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피사체를 함께 보고 싶어졌다. 구원을 갈망하듯 먹을 것을 향해 뻗치고 있는 아이들의 절규하는 손들, 바닥으로 던진 부스러기들을 하나라도 먼저 줍겠다는 아비규환의 모습, 눈을 부라리고 싸우는 아이들과 서럽게 우는 아이들, 그때의 그 모습이 우리들의 서글픈 자화상이었다.

나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왠지 분한 마음에 울고 싶어졌다. 나는 그 거지 발싸개 같은 언어들, 각설이타령에도 없는 더러운 언어의 조각들을 다시는 외치지 않겠노라고 이를 앙다물었다. 헬로, 기브 미 껌! '기브 미 쪼꼬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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