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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교통대 커뮤니티센터 글쓰기 강사

바람이 뒷집을 허무는 중이다. 반질거리던 마당과 철마다 꽃들이 바투 피어나던 정원, 장골이었던 기와집도 주인이 없으니 세월 앞에 속수무책이다. 분홍빛 그 고운 홍매화 빈 가지 위로 박주가리 열매가 참새마냥 배를 불쑥 내밀고 넝쿨 따라 거풋하게 앉았다. 인기척을 느낀 것일까. 고양이 몇 마리가 허물어가는 흙담위로 풀쩍 뛰어 오른다. 바람이 휙 지나간다. 정원이 끝나는 곳에 있던 뒷간 낡은 문이 조용히 몸을 떤다. 양철로 된 문이다. 뒷간도 허물어가기는 여지없다. 그때 고양이 한 마리가 뒷간으로 살금살금 사라졌다. 아, 저 녀석도 아는 모양이다. 뒷간에서 지켜야할 행동거지를.

어머니는 형제자매 중 막내였다. 그러니 맏이였던 외삼촌의 자식들과 나는 나이차가 많이 나지 않아 조카뻘이었는데도 동무처럼 지냈다. 외갓집은 버스도 다니지 않는 산골의 흐느실이라는 곳이었다. 동네에서 제일 꼭대기였던 외갓집은 동네에서도 부잣집으로 알아주었다. 초등학교 때까지 어머니는 방학이 되면 으레 외갓집에 나를 맡기셨다. 모든 게 부요한 외갓집에서의 생활은 하루하루가 즐거운 일이었지만 딱 하나, 뒷간을 가는 일은 예외였다. 외갓집 뒷간은 밤에 보면 뒤꼍 밤나무 아래 오도카니 웅크린 커다란 곰 같았다. 초가지붕에 흙벽으로 만든 집이었는데 안은 꽤 넓었다. 앞쪽에 똥독이 있고 뒤쪽으로 아궁이 재를 모아 두었다. 똥독의 크기도 우리 집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둥근 통나무를 양쪽으로 세 개씩 엮어 발판을 만들어 똥독에 얹어 놓았다. 항아리 위에 얹어 놓았을 뿐이니 고정이 된 것도 아니었다. 중심을 잡지 못하면 한쪽으로 쏠리기도 하고 삐걱거렸다. 숨어드는 빛이 적어 낮인데도 뒷간 안은 언제나 어둡고 축축했다. 그나마 낮에는 판자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몇 줄기 빛이 있어 괜찮았다. 문제는 밤이었다.

그날은 온종일 눈이 내려 마당도 들판도 마법처럼 눈 속으로 숨어들어 잠을 자는 듯 고요했다.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어린 손자들을 위해 외할머니는 뒤꼍 장독대 항아리에 넣어 둔 고욤을 사발에 떠 오셨다. 처음에는 시커멓게 얼은 그 고욤이 손이 가지 않았다. 그것도 잠시 조금씩 떠 먹다보니 달콤한 맛에 숟가락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얼마나 먹었던 것일까. 밤이 되자 뱃속이 꾸르륵꾸르륵 요동을 쳤다. 외할머니는 요강에 보라 하셨지만 안 될 말이었다. 분명 작은 게 아닌 큰 것이 벼락같은 소리를 내며 쏴르르 쏟아져 나올 것이었다.

뒷간으로 가는 길은 안채와 헛간 사이를 지나야 했다. 호롱불을 들고 앞장선 외할머니 치맛자락을 꼭 움켜쥐고 따라갔다. 외할머니는 호롱불을 뒷간 안에 놓은 후 내가 발판에 자리를 잡는 것을 보고서야 나갔다. 나무문을 살짝 열어 놓고 뒤돌아선 외할머니는 계속 말도 걸어 주셨다.

"할미 여기 있다, 보이지?"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 바람만이 밤나무 숲을 휘돌다 뒷간 앞을 휘잉 몰아쳐 지났을 것이다. 가끔, 삐걱 삐걱, 문소리가 들렸다. 그건 아마도 외할머니가 온몸으로 매서운 바람을 막아주시던 순간이었을까. 내 이름을 부르시곤, 할미 여깃다, 하시던 외할머니의 음성이 어제인 듯 귓전을 맴돈다.

외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뒷집 뒷간을 지키는 중이다. 우리 집 담장과 가까이 있어 뒷집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될 만큼 가깝다. 냐옹, 고양이 소리로 알려 주었다. 괜찮다고, 무섭지 않을 거라고. 한참을 기다려도 고양이는 기척이 없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니 뒷간 한쪽 벽이 뻥 뚫려 있지 않은가. 헛웃음이 나왔다. 그럼에도 괜찮았다. 외할머니가 그랬듯 새신랑이었던 남편이 그랬듯 뒷간 앞에서는 그렇게 지켜 주는 것이 미덕이지 않던가. 그러니 헛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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