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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교통대 커뮤니티센터 글쓰기 강사

올통볼통 흙벽이었다. 흙벽에 바른 벽지는 여기저기 떠서 방안에 바람도 함께 살았다. 좁고 궁상맞은 단칸방에 달력은 떡 하니 터주 대감인 듯 당당했다. 종이도, 화장지도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달력은 여러모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옹색한 살림에 달력을 구입할 처지도 아니었지만 그 시절에는 달력을 돈을 주고 사는 집은 없었다. 동네 이장이나 혹은 읍내 농협에서 나누어 줬다.

달력은 24절기가 표시 된 농사달력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 하루에 한 장씩 찢어서 썼던 미농지 달력은 얇고 부드러워 가족 모두가 좋아했다. 화장지라고 특별히 없던 그때는 잡지책이나 다 쓴 공책이 뒷간의 용변을 처리하는 용도였다. 우리 집 미농지 달력은 하루를 버티지도 못하고 누군가에 의해 찢어져 나가곤 했다. 보드랍고 얇은 미농지와 뻣뻣한 책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누군가 해가 지길 기다리다 그날의 미농지 달력을 냅다 찢어서 뒷간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아버지가 읍내에서 얻어오는 달력은 미농지 달력 말고도 한 달이 들어 찬 농사달력이나 풍경화 달력도 있었다. 얻어 온 곳이 음식집이었는지, 다방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해는 비키니 차림의 여인 사진 달력도 있었다. 그 달력은 벽에 한 번 걸려 보지도 못했다. 그날 이후로 달력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했다. 그 달력을 마주한 건 봄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던 어느 날이었다. 새 학기가 되어 자식들이 새 책을 타오자 어머니는 농 뒤로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꺼내 오셨다. 비키니 달력이었다. 어머니는 둘둘 말린 비키니 달력 열두 장을 거침없이 북북 찢어 말리지 않게 엎어 깔고 앉으셨다. 비장하고도 담담한 표정의 어머니 모습을 우리 자식들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보기에는 민망했을지 모르지만 빳빳하고 튼튼해 버리기에는 아까웠을 것이다. 어머니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나는 그 표지를 풀어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름다운 갑옷을 입은 책은 나이가 어린 내 책에만 할당되었다. 오빠들의 책은 해가 지난 농사 달력으로 순한 갑옷을 입혔다.

요즘은 달력을 무료로 주는 곳도 흔하지 않다. 벽에 못을 박고 가족사진이 빼곡히 들어간 액자를 걸기도 하고, 달력이나 시계, 옷걸이를 걸던 시대는 이제 추억이 되었다. 벽에 못을 박지 않는 추세이니, 도시에서는 큰 달력을 원하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책상에 탁상달력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달력에 적던 중요한 일정도 핸드폰에 입력하고 알람으로 설정한다. 언젠가 달력도 귀한 유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할랑대던 벽지 사이로 드나들던 바람도 열두 달, 달력 뒤에선 숨을 죽였다. 달력은 결코 쉽게 죽지도 않았다. 용변 처리용으로, 인형놀이로, 담배종이로, 누군가의 책을 지키는 갑옷으로 변신한 용사였다. 그 뿐인가. 왁자한 대폿집에서 걸쭉한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다, 비키니 여인의 달력을 힐끔대던 사내들의 야릇한 술맛은 또 어땠으랴.

흐르는 것이 어디 물뿐일까. 사람도 세월도 흐르고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붙잡으려 안달이다. 오그라들고 바짝 마른 낙엽들이 바람의 매질에 이리저리 들쫓긴다. 철망에 걸려 찢어지기도 하고 차에 갈려 짓이겨지기도 한다. 길섶 복숭아나무에 매달린 노란 봉지가 때 지난 달력처럼 처연하다. 한때는 아기 엉덩이를 닮은 뽀얗고 오동통한 발간빛을 감쌌을 노란 봉지도 저렇게 비어 허깨비가 될 줄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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