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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3.12.14 14:27:03
  • 최종수정2023.12.14 14:27:03

한기연

음성문인협회장

소박한 살림살이가 윤기가 흘렀다. 여든 살의 그녀는 곱게 화장하고 예쁜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으로 마주했다. 정돈된 방안과 벽에 걸린 사진, 그리고 꽃다발이 눈에 띈다. '할 얘기 별로 없다'라며 손사래 치고 머뭇거리던 분이 아닌 듯 말문이 트이자 신이 나서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예총에서 '젠더 회고록 쓰기' 사업을 추진하고 글을 쓰는 소모임에서 구술작가로 참여하게 됐다. 어르신들을 뵈러 경로당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대상자를 쉽게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마을을 잘 아는 회원분과 함께 방문해서 취지를 말씀드리고 참여하실 분은 작가와 일대일로 연결해드린다고 했더니 묵묵부답이다. 비밀의 문을 연 것처럼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달변가인 예총회장도 속수무책이었다. 묵직한 문이 소리없이 닫히는 느낌이다.

우여곡절 끝에 70세 이상 되신 여성 어르신 열 명을 대상으로 한 명씩 구술작가로 연결하여 각자가 글을 쓰게 되었다. 나는 소이면에 살고 계시는 어르신의 일생을 듣고 글로 쓰기 위해 집으로 찾아갔다. 옛날 슬레이트 지붕의 천장이 낮은 집이었지만 주인의 깔끔한 성격을 엿볼 수 있었다.

세 시간 가까이 어릴 적 홀아버지 밑에서 집안 살림으로 고생했던 얘기며, 친구들과 청춘을 보내기까지 쉼 없이 이어졌다. 점심때가 되어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하니 아욱국이 맛있다며 밥상을 차려 주신다. 열 한 살부터 집안의 맏딸로 살림을 살아 낸 내공이 보인다. '여자는 이래야 해'라는 사회적 성 역할이 팽배하던 시절의 그녀는 어렸지만, 집안일은 당연히 그녀의 몫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시간을 거슬러 가는 그녀의 기억은 너무나 또렷했다. 꼿꼿하게 방바닥에 앉으셔서 이야기하는 동안 치매를 앓고 있는 친정엄마가 자꾸만 겹쳐 보였다. 친정엄마는 몇 년 전 인공관절 수술 후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방바닥에 앉지도 못하시고, 치아도 몇 개 남아 있지 않다. 더군다나 기억은 점점 더 희미해지고 있어서 늘 불안하다. 그녀가 팔십 평생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며 친정엄마의 어린 시절과 처녀 때 모습도 궁금했다.

힘든 시절을 겪었지만, 지금은 그녀의 이름으로 불리며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도 배우러 다니고, 무대에 서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 친정엄마는 서른 중반에 홀로 되어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살았다. '누구 엄마'로 칠십 평생을 살다가 몸과 마음에 병이 들고 나서 이름으로 불린다. 주간 보호센터에서 부르는 이름 석 자와 병원에서 환자인 엄마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여성이 살기 힘들었던 시대의 어르신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한 편씩 글을 묶어 책을 발간했다. 출판식에 초대해 책 한 권을 건네니 그녀가 환하게 웃는다.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으나 가장 잘한 일이다.

모두가 인생의 황혼이 아름답기를 바라지만 쉽지는 않다. 서산마루에 걸린 붉은 노을 속에 그녀가 보인다. 황홀하게 타들어 가는 빛이 그녀를 닮았다. 그녀도 그 시절 여성의 삶을 고스란히 겪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알고 온전한 자신의 이름으로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흔들리듯 희미한 노을빛에 엄마의 이름 석 자를 손으로 그려본다. 단단하게 보듬고 딸의 가슴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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