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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연

음성문인협회장

새벽 3시, 세상은 고요하다. 공항이 가까울수록 빛이 보이고 소음이 들린다. 출발할 때 내리던 비도 그쳤다. 약속 장소로 이동해 출국절차를 밟았다. 올해 초에도 아들과 공항에 왔었는데 낯설다. 수화물 탁송까지 무인 단말기로 하면서 기계치의 진면목을 확인한다. 중국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멀고도 험한 길을 달려와서 출발 전에 지친다.

한 달 전쯤, 급하게 중국대학과의 학술대회 일정이 잡혔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참가를 결정하고 일정을 조율했다. 그런데 첫 관문부터 쉽지 않았다. 4박 5일간 학술대회 목적이지만 비자를 신청해야 했다. 신청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나 문제는 서울 비자센터를 직접 방문해서 지문등록을 해야만 했다. 그 날짜도 내가 원하는 시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비자 접수 후 정해진 날에 꼭 가야 했다.

비자등록 일정을 못 맞춰서 당초에 가려던 선생님 몇 분이 포기했다. 하루를 비워두고 전날 서울 아들 집에서 잤다. 중국 비자센터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다. 일행을 만나서 지문등록을 하기까지 10여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심사가 까다롭고 어려울 거라는 예상과 달라서 모두 허탈한 표정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가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중국에 도착하니 우리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는 유학생이 마중 나왔다. 도시철도로 이동하는데도 외국인이라 절차가 까다로웠다. 먼 곳까지 마중 나와서 안내하는 그들의 수고로움이 없었다면 세 시간 가까이 걸리는 목적지까지 당도하지 못했으리라.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귀한 손님으로 환대하는 그들의 표정과 마음이 차고 넘쳤다. 연일 폭염으로 달궈진 중국 땅에서 시원한 바람길을 만든다.

함께 간 교수님들은 그들에게 한국에서의 스승이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는 옛말을 실천하는 제자의 모습을 타국에서 마주하니 가슴이 뜨끔하다. 동행하면서 살뜰히 챙기고 식사때마다 성찬으로 차린 음식을 대접했다. 교수님 덕분에 덩달아 환대를 받으며 몸에 밴 그들의 예의 바른 태도에서 유교의 교리를 읽는다. 우리나라에 스승의 날이 있기는 하지만 기념일이 무색할 정도로 교권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 앞에 씁쓸할 따름이다.

비자발급의 난관으로 오지 못했을 수도 있는 낯선 곳에서 귀하고 은혜로운 시절인연을 만났다. 시절인연은 중국 명나라말 항주 운서산에 기거한 승려 운서주굉(雲棲株宏)이 조사법어를 모아 편찬한 『선관책진(禪關策進)』에, "시절인연이 도래(到來)하면 자연히 부딪혀 깨쳐서 소리가 나듯 척척 들어맞으며 곧장 깨어나 나가게 된다"라는 구절에서 연유한다. 삶이 끝날 때까지 수많은 인연의 시작과 끝이 시기마다 다를 것이다.

중국 학술대회를 준비하는 과정과 4박 5일 동안 끈끈하게 이어진 학우와의 관계에서 거리감을 좁힌다. 1년여 동안 동문수학하면서 가벼이 눈인사로 마주하던 사람과는 속말도 나누는 사이로 친밀함이 생겼다. 중국에서 학술대회를 함께하며 만난 유학생을 보며 스승을 대하는 존경의 자세를 바로 세우고, 또 하나의 연을 맺는다.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을 그들의 마음가짐이 바람처럼 길을 내며 여름 더위를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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