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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8.11.18 15:45:18
  • 최종수정2018.11.18 16:16:43

조일희

수필가

 마음이 스산하고 몸이 오슬오슬 한기라도 들라치면 생각나는 음식이 있다. 바로 순댓국이다. 편안할 때는 무심히 지내다가도 사는 게 팍팍할 때면 불쑥 그리워지는 친정엄마처럼 고단하거나 서글플 때면 뜨끈한 순댓국 한 그릇이 간절해진다.

 평소 식당의 청결이나 분위기를 따지는 편이다. 그런 내가 순댓국집만큼은 삐걱거리는 나무 문짝을 열고 들어가는 허름한 식당을 부러 찾아간다.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앉은뱅이 상에서 먹는 국밥은 한 끼 밥이 아니다. 보약 한 첩이다. 땀까지 뻘뻘 흘리며 한 그릇 비우고 나면 가라앉았던 기분이 되살아나고 맥없이 처져 있던 몸에 생기가 도니 말이다.

 순댓국을 처음 먹은 건 고등학교 때이다. 등교 시간에 쫓기던 나는 뺑 돌아가야 하는 넓은 길보다 시장 통 사이로 가는 좁은 길을 더 좋아했다. 늘 다니던 길이었건만 그날은 달랐다. 코끝을 스치는 냄새가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는 나를 뒤돌아서게 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족발이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옆에 누운 거무튀튀한 순대도 길쭉한 손으로 나를 붙잡았다. 침이 꼴깍 넘어갔지만 뿌리치고 돌아섰다. 촉박한 시간도 시간이려니와 돈이 없었다. 족발과 순대의 유혹은 끈질겨 배고픈 나를 온종일 옭아맸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몸져누웠다. 보고 싶은 사람을 못 보면 상사병이 난다는 소린 들어봤지만, 먹고 싶은 걸 못 먹어도 병이 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버지와 둘이 남의 집 문간방에 세 들어 근근이 사는 형편에 족발과 순대가 먹고 싶어 병이 났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아픈 까닭을 모르는 아버지는 공부하는 게 힘들어서 그러려니 여기는 눈치였다.

 멀리 있는 엄마가 보고 싶었다. 절인 배추처럼 누워 있다가 주인집 전화를 빌려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엄마, 엄마 나 아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막내야, 어디가 아파서 그려" 울음 섞인 내 목소리에 엄마 목소리가 커졌다. 난장에서 생선을 팔던 엄마는 그 길로 좌판을 걷고 3시간이 넘는 길을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버지가 아무리 나를 살뜰히 보살펴 준대도 엄마의 빈자리는 늘 그리움으로 그늘져있었다. 엄마를 보자 힘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부엌에서 부산스레 움직이는 엄마의 소리를 듣다가 까무룩 잠이든 모양이다.

 "야야, 일어나봐라." 솜씨 좋은 엄마는 그새 따끈한 순댓국을 만들어 놓고 나를 깨웠다. 숟가락 위에 뻘건 깍두기를 연신 올려 주던 엄마 손이 느려졌다. 허겁지겁 먹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슬픔의 잔주름이 엄마 얼굴을 덮고 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처박고 바닥에 남은 국물 한 방울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엄마의 사랑을 먹은 나는 용 든 약이라도 먹은 듯 뚝딱 일어났다.

 어릴 적 엄마 등에 업혀본 기억이 한 토막도 없다. 함석 다라를 머리에 이고 이 동네 저 동네 생선을 팔러 다니던 엄마 대신 내 곁엔 열세 살이나 차이 나는 큰언니가 있었다. 언니가 시집간 후에는 기운 없는 할머니가 나를 돌봐줬고,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병약한 아버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나는 아침에도, 밤에도 엄마가 보고 싶었다. 허나 아지랑이처럼 엄마는 눈앞에 아른거리기만 할 뿐 손에 닿지 않았다. 나는 채워지지 않는 사랑에 노상 허기가 졌다.

 엄마는 이따금 집에 들렀다. 고달픈 엄마의 인생까지 엉겨 붙은 생선 냄새가 엄마 몸에서 진하게 풍겼지만 그 비릿한 냄새마저도 나는 좋았다. 엄마는 밤새 뽀얀 국물을 한 솥단지 우려 놓고 아침이 되면 다시 먼 길을 떠났다. 그때부터 인가, 내게 뜨끈한 국물은 엄마의 사랑이자 그리움의 표상이 됐다.

 어느 작가가 '시장기는 얼마나 많은 추억을 환기시키는가.'라고 말했다. 몸 져 눕던 날, 순대와 족발의 구수한 냄새가 오랫동안 보지 못한 엄마를 떠올리게 했나 보다.

 아련한 그리움과 허기까지 채워준 그날의 순댓국은 오늘도 진한 국물로 나를 따뜻하게 보듬어준다. 부쩍 쌀쌀해진 이즈음, 시장 통에 있는 장뜰 국밥집에나 가야겠다. "아줌마, 여기 순댓국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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