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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8.07.29 15:36:29
  • 최종수정2018.07.29 15:36:29

조일희

수필가

길모퉁이를 돌아서자 골목 한 편이 환하다. 붉은 꽃무리가 이층집 벽을 타고 올라가 곱게 단장을 해놓은 까닭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만난 능소화는 어릴 적 고향을 떠올리게 해 반가운 마음이 왈칵 앞섰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화려한 꽃은 어느 해 여름 아득한 풍경 속으로 나를 이끌며 마음을 갉작였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여름날, 엄마는 막내 오빠 뒷바라지를 한다며 갑작스럽게 서울로 올라가셨다. 사업 실패로 삶의 동력을 잃어버린 아버지와 많은 식구를 책임지느라 고단한 엄마는 물과 기름처럼 베돌았다.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해도 오빠 학업 때문에 올라간다는 그럴듯한 명분 뒤에 두 분의 불화가 숨겨져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서둘러 아버지와 둘이 살 집을 구해야 했다. 엄마가 주고 가신 얄팍한 액수에 맞는 방을 구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변두리로 나가면 구미에 맞는 방이야 구할 수도 있겠지만, 시내 고등학교에 다니던 내겐 그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방 구하는 일이 더뎌지자 엄마는 유리공장 하는 엄마 친구네 집을 권했다. 아버지는 단박에 싫다고 말씀하셨다. 마누라 친구 집에 얹혀산다는 게 마뜩잖아 거절했겠지만 나는 못내 아쉽기만 했다.

한여름 땡볕도 살짝 넘어간 오후, 세상 사람들이 일제히 휴거(休居)라도 된 듯 텅 빈 골목길에는 아버지와 나, 둘 뿐이었다. 무뎌진 걸음으로 긴 골목길에 들어서자 나른한 오후와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능소화가 눈에 들어왔다. 방 한 칸 구해 보겠다고 발품을 팔고 다니던 남루한 우리 부녀와 달리 꽃은 너무나도 환하게 빛이 났다.

능소화가 피어있는 막다른 집 대문을 두드리자 엄마와 비슷한 연배의 아주머니가 나오셨다.

"아줌마, 방 내놓았어요?"

"예."

아주머니는 아버지와 나를 빤히 바라보며

"아이고, 우리는 낮에 집 볼 사람을 구하는데" 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네, 낮에 제가 집에 있습니다." 아버지는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 끝을 낮췄다.

아주머니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안채 왼쪽을 돌아 뒤꼍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자그마한 터앝이 먼저 반겼다. 뒷방은 좁은 툇마루가 있는 햇볕이 잘 드는 방이었다. 작은 방이지만 두 사람이 지내기에는 그다지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담장 위로 늘어진 능소화까지 내 차지가 될 터인데. 아버지와 나는 만족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으며 안채로 다시 나왔다.

그때 대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너 우리 집에 웬일이냐?" 반색을 하며 나와 아버지를 쳐다보는 사람은 같은 반 친구 경순이었다. 순간 커닝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내 얼굴은 빨개졌다. 아주머니와 경순이에게 마른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허겁지겁 그 집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한참 동안이나 말씀이 없으셨다. 그날 아버지는 딸자식 친구네로 이사를 해야 하나 수없이 고민하셨으리라. 당신이 무능해서 딸내미에게 이런 일까지 겪게 하는구나 싶어 얼마나 착잡하셨을까. 하지만 미욱했던 나는 아버지 근심 따윈 짐작조차 못했다. '학교에서 경순이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하지, 걔가 딴 애들한테 오늘 일을 얘길 하면 어떡하지.' 꼭꼭 숨겨놨던 가난의 민낯이 행여 들통이라도 날까 봐 걱정스러울 따름이었다.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그 집으로 이사 가고 싶었다. 능소화의 밝은 빛이 헛헛한 내 마음을 온기로 가득 채워 줄 것 같았다. 또, 황홍색 꽃이 내뿜는 붉은 기운이 궁핍한 현실을 잊게 할 행운의 부적처럼 여겨졌다. 옹색한 여러 이유는 간절한 바람이 되어 그 집 대문을 두드리게 했지만, 환하게 빛나던 꽃 부적은 한 조각 꿈이 되어 흩어져버렸다.

결국, 유리공장 아줌마네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철딱서니 없는 딸년을 위해 가고 싶지 않았을 당신 마음을 끝내 접으셨다.

다시 여름이다. 능소화를 보면, 텅 빈 골목길에서 행여 딸년에게 들킬세라 서글픈 마음을 속으로 삭였을 아버지가 떠올라 마음이 서늘해진다.

올해도 능소화는 흐드러지게 피겠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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