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직전과 흡사하지 않은가

2022.10.04 17:18:55

최종웅

소설가

김영삼 정권시절 외환위기 징후가 짙어지고 있을 때 안기부가 충격적인 일을 벌였다. 삼성이 명절에 권력기관에 배포할 선물을 논의하는 현장을 도청한 것이다. 청와대 국회 검찰 등 각계 유력인사에게 무엇을 얼마큼 줄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음성이 녹음되었다.

서민 입장에서는 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재벌이라는 조직이 그만큼 번창하기 위해서는 권력과 유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의심했지만, 한 번도 그 현장을 목격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일벌백계로 엄중처벌해서 다시는 기업과 권력이 유착하는 일이 없도록 발본색원해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화살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안기부는 재벌이 명절선물을 권력기관에 배포하는 것과 같은 일을 도청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물론 간첩을 잡기위해선 도청도 해야겠지만, 국가안보를 위한 경우로 엄격히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재벌과 권력의 유착관계를 발본색원해 주기를 바라는 여망은 여지없이 무너졌고, 오히려 정보기관의 불법적인 도청이 서리를 맞는 계기가 되었다.

요즘 정치권에서 논란이 되는 비속어 파문 등을 볼 때마다 안기부 도청처럼 취재를 위한 도청이나 촬영은 어디까지가 합법적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대표적인 게 윤석열 대통령과 권성동 의원 간 문자였다.

내부 총질하는 대표가 없어지니 당이 달라졌다는 취지였다. 권성동 원내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한 후 국민의힘이 달라졌다고 격려하는 내용이었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 간에 충분히 나눌 수 있는 사적인 대화였는데도 대통령은 물론 국민의힘까지도 파란을 겪고 있다. 40%대를 유지하던 대통령 지지율이 20%대로 반 토막이 났고, 야당은 윤석열 대통령을 내쫓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라도 발견한 듯 파상적인 공세를 펴고 있다.

이준석이 가처분 정치를 시작할 수 있는 용기도 바로 대통령 지지율이 급락한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때문에 대통령과 여당이 제 역할을 못한다는 것은 국가 이익에도 상당한 타격을 입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아무도 언론이 사적인 문자를 촬영해서 국익을 저해하고 있다고 항의하지 않았다.

대통령이나 여당 대표가 사적인 대화를 취재당해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면 당연히 손해를 배상 받으려고 하는 것은 물론, 제도까지 개혁하려는 노력을 해야 마땅하다.

국회의장에게 사진기자들이 국회의원의 사적인 문자 촬영을 삼가토록 공문을 발송한다든가. 언론사에 사적인 대화는 기사화하지 말도록 요청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도 되지 않을 땐 입법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희한한 것은 이렇게 많은 방법이 있는데도 단 한 가지도 활용하지 않고 묵묵히 참고 견디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견딘 결과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윤 대통령이 UN총회 연설을 위해 미국을 방문해 바이든 대통령과 환담 후 헤어지면서 박진 외무장관과 나눈 넋두리가 방송된 것이다.

누가 들어봐도 불명확한 발음인데도 바이든으로 해석해 자막까지 달아 방송함으로써 한미동맹을 해친 것이다. 정상적이라면 한미동맹을 해칠 수 있는 내용을 취재했더라도 미국에 알리기 전에 대통령실 등과 우선 상의하는 게 우리 언론의 자세다.

왜냐하면 윤 대통령은 바이든에게 전기차 보조금, 한미 통화 스와프, 북핵 문제 등을 부탁하는 입장인데 어떻게 바이든을 비난할 수 있겠나. 불명확한 발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자막까지 달아 방송하면 미국에서도 파란이 일 것이고, 한미동맹을 해칠 수 있다는 상상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더구나 대통령의 사적인 대화를 녹음한 것이라면 합법성까지 의심 받을 수도 있으니 더욱 신중했어야 했다. 정작 피해를 입은 미국은 괜찮다고 하는데, 우리 야당은 외교장관 해임건의를 한 이유는 뭔가?

국익보다 정파를 생각하기 때문 아닌가. 외환위기 직전처럼 환율·주가·물가가 요동치는데도 김영삼 이회창 김대중이 사생결단하던 1997년과 흡사하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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