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청춘 인권을 말하다
저자 : 허다연 외 7명, 출판 : 한티재
20여년 전 미국유학시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과 해결방안을 다룬 흥미로운 책 한 권을 밤새 읽은 적이 있다. 내용과 결론도 볼만 했지만 그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방법론이었다. 서로 으르렁거리는 양 진영 각각에 충실한 애국심을 가진 두 젊은이의 대화와 토론을 통해, 각자 자기편의 이익을 충실히 지키면서 토론한 결과 당초 생각지 않았던 새로운 상생적 대안을 도출해내는 과정을 풀어낸 독특한 방법론이 인상적이었다.
'남북청춘, 인권을 말하다'가 내 눈길을 끈 최고의 매력 역시 바로 그 방법론이었다. 이 책은 남과 북에서 태어난 6명의 대학생들이 여성, 이주노동자, 아동, 청소년, 군대, 성소수자, 장애 등 다양한 영역에서 듣고 본 인권문제를 토론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토론의 참가자이자 공동저자들인 6명의 남북청년들이 다룬'인권'이라는 주제 그 자체보다, 그 토론과정에서 엿보이는 참가자들의 관계 그리고 이런 주제를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북한출신 청년들의 속생각을 읽고 싶었다.
이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조율한 김성아(더 나은 세상을 위한 공감 이사)이사는 40대 중반의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다.
사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남한출신이건 북한출신이건 그 다양한 주제에 대해 얼마나 깊이 있는 경험과 토론이 가능하겠나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공동의 주제를 놓고 무려 9개월간 매주 함께 만나며 토론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 그 과정에서 북한 출신의 청년들이 과장되지 않은 목소리로 자신들의 고향 북한과 새로운 고향 대한민국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은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방법론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9개월의 토론과정을 함께 한 김성아 이사를 대구발 열차에서 막 내린 서울역 대합실에서 만났다.
-월남귀순자, 귀순동포, 탈북자, 새터민, 탈북민, 북한이탈주민, 이주민 등 다양하게 변천해온 명칭 중 당사자들이 선호하는 것은.
"딱 떨어지게는 없는 것 같다. 새터민도 그다지 선호하는 것 같지 않더라. 본인들은 그냥 '우리'라고 하고, 나는 주로 북한이주민 명칭을 쓴다. 현실에선 '북에서 온', '저쪽에서 온' 이라는 수식을 쓴다."
-9개월에 걸친 토론 과정을 대략 설명해 달라. 또 어려웠던 점은.
"탈북 대학생들과 인문학모임, 시 읽기 모임을 한 적이 있다. 그 독서모임에 참가했던 멤버들이 이번 프로젝트 출발에 적극적 역할을 했다. 남북 공히 26세 전후의 대학 4학년생 위주였다. 북한 출신은 남한체류 5년차 정도. 나는 진행과 조율만 했다. 책이나 영상 등 교재를 보고 토론하고 소감을 쓰는 방식으로 9개월 걸렸다. 초기 걱정은 북쪽 학생들이 토론과 글에서 밀리지 않고 잘 따라갈 수 있을까였다. 실제 해보니 토론이 잘 이루어졌다. 글쓰기는 남북 모두 문제였다. 훈련들이 너무 부족했다."
-토론도 토론이지만 친구가 되어 우정이 쌓여갔을 텐데.
"같은 세대라는 점이 중요했던 것 같다. 나만 해도 늙어서(웃음). 재미를 공유하며 우정이 깊어졌다."
남북이 공감하는 도덕적 구심점으로서 공통가치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썼는데· 역사문제 등 공감할 만한 다른 토론주제라면.
공동체에서 공익적 가치나 삶의 사명을 추구하는 양심 같은 것이 토론과정에 작용한 암묵적인 공동가치였던 것 같다. 남북 청년 모두 취직문제 앞에서는 사회적 약자로서 서로를 위로했다. 취직, 결혼, 출산 등 미래라는 문제는 공동의 이슈가 될 것 같다. 남북 공히 현대사는 잘 모르더라."
-단독으로 탈북한 청년들의 경우 동기가 뭘까· 본인들은 '알 수 없는 반항심', '인간다운 삶' 이런 표현들을 쓰던데.
"거창하게 자유의 갈망, 속박에 대한 염증이라기보다는, "중국엔 뭐가 있다더라", "(나도 한국드라마처럼) 헤어스타일을 다양하게 하고 싶다" 등 현실에 대한 답답함, 정보에 대한 호기심이 많더라. 드라마의 영향은 어른들에게도 참 컸던 것 같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교육 등 토론주제 중 흥미로웠던 내용이 있다면.
"남북 모두 뿌리 깊은 가부장적 권위가 유지되는 사회체제임을 확인했다. 여성에게 사회에 진출하라면서도 가사와 노동을 다해내는 슈퍼맘 노릇을 강요하는 건 남북이 하나더라. 북의 경우 장애인을 사회적으로 격리시켜, 장애인 문제 아니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많더라. 성소수자는 본 적은 없지만 '그런 일이 있다더라'라고 들었다고 하는 데서 보듯 아직 북에서는 철저히 음지의 이야기다. 북한의 학교에서 외화벌이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돈을 걷는 과정에서 빈부격차에 따른 소외감을 깊이 느낀 것 같다. 북한 학교 현장의 교사폭력도 비일비재하고…"
왼쪽 김민석 교수와 대화를 나누는 김성아 이사
-북한에서 온 청년들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현저하게 체감하는 인권문제는.
"솔직히 잘은 모르는 것 같다. 아직 젊고 경험도 적고, 대우도 북보다는 낫고…….취업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 마트에서 알바를 하며 경험하는 부조리 등은 남쪽 학생과 마찬가지다."
-법적으로 금지된 사교육이, 무상교육의 나라 북한에서 대기근 이후 시장행위로 발전했다는 참가자들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미모가 중요한 직업을 희망하는 학생들의 경우 선생들의 소개로 쌍커풀 수술을 하기도 한다더라. 평양 거주자는 거의 과외를 하고. 북에서 평양과 다른 지역의 격차는 남에서 서울과 지방의 격차와는 비할 수 없이 어마어마한 것 같다."
-북한 출신 청년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정체성은 뭘까· 북을 배신한 거 아닌가 하는 심적 부담, 남쪽 친구들에 대한 열등감, 북에서 온 사실을 친구들에게 고백하지 못하는 갈등 등을 엿볼 수 있는데.
"어디에도 속하면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캐나다 여행을 갔던 어떤 학생의 경우 남북을 따지지 않는 외국환경을 거치면서 세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추구하기도 하더라. 처음에는 북한과 연관된 것을 다 부정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시달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간직하는 것 같다."
-남한 정착과 대학진학 후 가장 큰 고통은 뭐든가.
"영어와 외로움이다. 공부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생소한 영어단어가 워낙 많으니. 또 친구가 없고, 탈북 대학생끼리 절친이 되는 경우도, 될 생각도 많지 않은 것 같다."
-북한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본인들은 욕하지만 남들이 북한을 욕하면 자신에 대한 욕처럼 느껴지는 묘한 애증이 있다고 들었다.
"그다지 얘기 안 한다. 사실 어려서 온 친구들은 북한을 잘 모른다. 마치 북한대표선수처럼 보고 질문하면 그저 할말 없는 갑갑한 경우가 많을 것이다. 어려서 온 청년들에겐 북한이 그저 고향일 뿐인 경우가 많다"
-1세대 탈북자로부터, (북에서도 교육받고 남에서도 고등교육을 받은) 청년세대가 통일의 미래주역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본인들은 어찌 생각할까.
"탈북 1세대에겐 생존과 자녀교육이 전부였다. 2세대는 번듯한 직업을 갖고 자기 꿈을 펼치길 원한다. 통일 후 고향에 가서 뭔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자각과 부담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남한 청년들의 통일인식이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변하던가.
"요새 젊은이들은 통일에 별 생각이 없다. 통일되면 경제적으로 좀 나아지겠다 정도일까· 그러나 탈북한 사람을 난생 처음 만나보고 비로소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남북 공히 4-50대 이하로 가면 통일 열망이 떨어지는데, 어쩌면 그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남북 모두 개개인에게 이득이 되는 통일로 차분하게 나아가는 데에는."
-탈북 이주민은 '미리 온 통일'이다.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 사회는 통일을 예행 연습한다. 이번토론을 통해 가장 크게 느낀 바는.
"북한도 변해야 하지만 우리도 변해야 한다. '직접 만나보니까 이런 문제가 중요하네! 이런 점은 미리미리 대비해야겠네!'라는 인식을 참가자들이 갖게 된 것이 소중한 소득이다. 남북관계도 결국 접촉과 교류가 중요할 것이다. 우리 사회 안에서 탈북 이주민과 자연스레 섞여야 한다. 이웃집 김씨 아저씨, 박씨 총각, 이런 식으로 2만8천명 탈북자를 '통계상의 수치'가 아닌 하나의 사람, 친구로서 바라보면 많은 문제가 변한다"
독일에는 통일 이후 동서독 출신 주민 각 5명씩 10명이 2박3일 동안 서로 소통하는 '생애 나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서포럼이라는 단체가 있다. 지금까지 수천 명의 독일인이 서로의 신원과 대화 내용을 비공개하는 조건으로 서로의 생애, 즉 삶을 나눴다. 서로의 발언에 대해 평가하지 않고, 낯설거나 이상한 이야기가 나와도 표정과 자세를 바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수칙이다. 이 과정을 거치는 동안 서로의 과거와 정체를 알고 분위기가 험악해지기도 하지만 헤어질 때는 이해하고 포옹한다. 동독 출신 메르켈이 총리까지 되었지만, 아직 동독 출신은 사회적 지위가 낮고 임금평균이 서독의 77프로이다. 그런 독일의 진정한 경제-사회-심리적 통합의 진전을 이루고 상호 무지와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 동서포럼처럼 다양한 노력이 진행 중인 것이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야비함을 수시로 드러내는 한국사회는 과연 통일을 맞이할 정신적 준비를 얼마나 하고 있을까? 이 책이 만들어지는 동안 한 남쪽 여대생이 '언니, 오빠, 그렇게 힘들게 여기 온 줄은 몰랐어. 미안해'라며 울먹였다는 이야기와, '흔들리며 피는 꽃'이란 시에 자신을 비유하며 울먹인 한 북한 출신 여대생이 이런 모임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피력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서로가 대화하고 상대를 이해하는 고통스럽고 긴 시간을 차근차근 밟아가는 것. 그것이 통일이고 희망이라고.
◇ 이 책의 저자들
남과 북에서 태어난 91년생 전후의 대학생 여섯 명. 북에서 온 경우 탈북 이후 약 5년의 해외체류를 거쳐 대한민국에 정착한지 보통 5년째 되었다. 참가자 모두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도시 대구에 살고 있다. 이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조율한 김성아(더 나은 세상을 위한 공감 이사)는 40대 중반의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이다. 교수직을 그만두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것을 계기로 재미있는 삶, 품위 있는 사회를 꿈꾸는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인도주의실천 의사협의회 초기멤버이고 2009년부터 정신건강치료 등으로 북한이주민 관련 활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