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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짚어보는 한국의 옛 인쇄문화

세계를 앞선 인쇄술… 지식문화강국 불을 지피다

  • 웹출고시간2010.09.19 20:51:11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편집자 주

최근, 서지학자인 경북대 남권희 교수가 청주 흥덕사에서 찍어낸 현존하는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보다 138년 앞선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의 증도가자 12점을 확인했다고 발표함에 따라 국내 서지학계가 요동을 치고 있다. 금속활자와 금속활자본을 비교하는 것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나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한국이 금속활자 발명국가라는 사실을 더욱 확인시켜주는 증좌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옛 인쇄를 반추해 본다.

청주시 운천동에 있는 흥덕사지와 청주고인쇄박물관 전경. 현존하는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를 인쇄한 곳이다.

인쇄문화의 발명은 '제2의 프로메테우스 불'만큼이나 인류사에 혁명을 가져온 결정적 일이다. 만약 인쇄문화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컴퓨터, 인터넷의 탄생은커녕 남의 책을 일일이 베껴서 보는 불편을 겪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인쇄문화의 출현으로 특정인만 소유했던 각종 생활정보를 누구나 접근하게 되었으니 정보의 습득과 너와 나의 소통은 인쇄문화로 인한 대량 전달로 가능하게 되었다.

그 소통의 중심축은 다름 아닌 우리나라에 있었으니 오늘날 한국이 인터넷 강국으로 자리 잡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쇄문화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필사본이나 금석문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청주시 봉명동 유적에서 나온 대길(大吉)명 소동탁(小銅鐸 · 말방울)은 7세기경의 작품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금석문이다. 전국에 산재한 철당간 중 국보로 지정된 것은 고려 광종 13년(962)에 세워진 청주용두사지철당간(국보 제41호)이 유일하다. 당간 세 번째 철통에 고려의 독자적 연호인 준풍(峻豊)이라는 글씨 등 금석문이 돋을 새김(양각)돼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금석문은 그 후에 '직지심체요절'을 탄생시킨 원인(遠因)이 된다. 중국에서 한국을 부러워하는 세 가지 보배가 있다.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그리고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 바로 그것이다. 모두가 인쇄문화에 관련된 것들이다. 이에 시대별로 한국의 옛 인쇄문화를 정리, 소개해 본다.

◇신라시대 인쇄문화

경주 불국사 석기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세계 최초의 인쇄물이다.

우리나라의 인쇄문화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정확치 않다. 다만 1966년 10월, 경주 불국사 석가탑(국보 제21호)에서 나온 목판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그 상한선으로 잡고 있다. 이 경(經)은 751년(경덕왕 10) 석가탑을 세울 때 봉안할 것으로 실제 인쇄 시기는 751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금속활자본, 목판본, 목활자본 등 모든 인쇄물 증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다. 우리는 통상 금속활자만이 세계인쇄문화의 종주국임을 알고 있으나 목판인쇄물까지 합쳐도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 경에 측천무후자가 있다는 점을 들어 신라 유학생이 중국에서 찍어간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고 있지만 측천무후자는 팔만대장경에도 등장하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 더구나 이 경이 한지에 인쇄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주장은 매우 군색한 입장이다. 측천무후자는 중국의 여황제 측천무후 시대에만 사용하고 없어진 글자를 말한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도굴꾼이 석가탑을 도굴하는 과정에서 찾아졌다. 도굴꾼이 이를 도굴하다 스님한테 들키자 도굴품을 현장에 놓고 달아났는데 이것이 바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다. 1천2백 여 년이 지났음에도 보존상태가 양호하니 이는 한지와 먹의 우수성을 반증하는 사례다.

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770년경에 인쇄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이 세계 최고의 목판본으로 알려졌으나 이 경이 발견됨으로써 그 기록을 갈아치웠다. 중국의 경우에는 868년에 인쇄한 '금강반야바라밀경'이 중국 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 인쇄물이다.

◇고려시대 인쇄문화

현존하는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표지(왼쪽)와 간기(오른쪽).

고려시대로 접어들며 13세기 초에 드디어 금속활자가 발명되어 상정예문(詳定禮文),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직지심체요절 등의 금속활자본이 등장하였으니 이는 독일의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78년~200여 년 앞선 것이다.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신인상정예문발미(新印詳定禮文跋尾)'에 따르면 "금속활자로 '상정예문' 28부를 찍어 해당 관청에 나누어 주고 보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상정예문은 질서, 절차 등 제례(制禮)관한 책으로 1234년에 찍었다.

또 1239년에는 요즘 논란의 핵심에 서 있는 증도가가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 목판본 증도가에 적힌 최이의 발문에 따르면 "증도가는 참선하는데 매우 요긴한 책이지만 전래되지 않아 기존에 금속활자로 간행된 이 책을 목판본으로 다시 새겼다(重彫鑄字)"라고 명시했다. 그러나 금속활자로 찍은 두 책은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전하지 않고 다만 목판본 증도가 만이 전한다. 최근 금속활자본 증도가를 인쇄하는데 쓰인 금속활자 12점이 확인되었다고 남권희 경북대 교수는 밝히고 있으나 활자의 진위(眞僞)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고려시대 금속활자는 현재 2점이 전하는데 모두 개성에서 출토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개성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산 무너질 복(山+復)' 활자가 있으며 북한의 개성역사박물관에는 개성 만월대 신봉문에서 발굴된 '이마 전' 자가 있다. 이 두자는 현재 쓰이지 않는 고활자이다.

고려시대 목판인쇄의 백미는 역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다. 불교가 국교인 고려시대에는 사찰을 중심으로 목판인쇄가 발달하였다. 1007년(목종10)에는 개성 총지사에서 찍어낸 보협인다라니경(寶·印陀羅尼經)이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 현종 때는 거란의 침입을 받자 문화적 대응으로 1011~1031년에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 간행되었고 그 연구 주석서인 교장(敎藏)이 문종의 넷째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에 의해 간행되었다. 초조대장경과 교장을 새긴 목판은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되었는데 1232년(고종19)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버렸다. 그 후 국가에서는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16년간에 걸쳐 만든 것이 1248년9(고종35)에 완성한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인데 이것이 바로 팔만대장경이다.

이 대장경은 내용과 새김이 정밀한 예술품이다. 전체 5천200만 자 중 오자는 18자에 불과하다. 목판은 산벚꽃나무, 후박나무로 재질이 단단하다. 이를 보관한 해인사 장경판전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대장경판은 세계기록 유산에 각각 등록되었다.

1305년 청주 원흥사(원흥사(元興社 · 元興寺)에서는 목판으로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이 인쇄되었다. 비록 목판본이지만 직지심체요절보다 72년 앞선 것으로 직지의 탄생을 예고한 인쇄물 격이 된다. 고서에는 "청주 남쪽 2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했다. 산남 3지구 택지개발당시 두꺼비 서식지인 '원흥이 방죽'일대로 추정되었으나 발굴조사 결과 그럴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직지심체요절을 찍어낸 청주 흥덕사(사적 제315호) 전경.

고려 말 1377년(우왕3)에는 인류사에 빛나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을 청주 흥덕사에서 찍었으니 독일의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78년 앞선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다. 선의 요체를 고승 백운화상이 초록한 것으로 그의 제자 석찬, 달담이 만들었고 비구니 묘덕(妙德)이 출판비를 시주했다. 구한말 프랑스 공사였던 꼴랭 드 쁠랑시가 수집하여 프랑스로 가져갔고 서지학자 모리스 꾸랑이 '한국서지'보유편에 소개하였다. 골동품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를 거쳐 그의 유언에 따라 1953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1900년 만국박람회때 첫선을 보였으나 눈길을 끌지 못했다가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파트타임 잡(시간제)으로 일을 했던 박병선 박사에 의해 '세계도서축제'에 출품되었다. 유네스코의 공인을 받아 2001년에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으니 이는 청주시민의 문화적 자긍심을 한층 높여주는 쾌거였다. 현재 유네스코와 청주시가 공동으로 유네스코/직지상을 신설하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여 격년제로 시상하고 있다.

◇조선시대 인쇄문화

복원된 조선 첫 금속활자 ‘계미자’

조선시대 인쇄술은 고려 인쇄기술을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켰다. 1403년(태종 3)에는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고 조선시대 최초의 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다. 세종 때에는 경자자(更子字·1420년))를 비롯하여 갑인자(甲寅字·1434년) 병진자(丙辰字·1436년) 한글활자(1447년)를 주조하여 유교, 의학, 농업, 천문지리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서적을 간행하였다. 조선시대의 금속활자는 대부분 구리였으나 병진자는 납으로 만들었다. 조선 후기에서는 민간에서도 철활자를 만들어 책을 보급하였다. 세종대왕은 1447년에 청동으로 한글 활자를 만들어 갑인자와 함께 조판하여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인쇄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한글 활자본이다. 한글 고활자는 고딕체로 그 서체가 미려하다.

또 다른 활자로 목활자가 있었다. 조선 태조는 고려 때의 서적원을 그대로 운영하여 목활자로 '대명율직해' 100부를 찍었다. 세종 때는 한글과 한자 큰 글자를 목활자로 만들어 금속활자와 함께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조정에서 인쇄 작업의 감독을 맡은 이를 감인관(監印官)이라 했다.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에 보면 활자장, 인쇄공들에 대한 벌칙이 나와 있다. 한 권에 한자의 착오가 있으면 30대의 매를 맞았다. 한 자가 더 틀릴 때마다 30대씩을 더 맞았다. 인출장(印出匠)도 먹이 진하거나 희미한 자가 있을 때마다 같은 벌을 받았다. 관원(館員 · 감독관)은 다섯 자 이상 틀렸을 때는 파직되었고 창준(唱准 · 활자 부르는 사람)이하는 매를 때린 뒤, 50일의 근무 일자를 깎았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관서 활자본에는 오탈자가 별로 없고 인쇄가 정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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