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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시인·수필가

결혼 전 특별히 내놓을 만한 조건이 없던 그 사람은 솥뚜껑 같은 손을 들이 밀며 자기를 믿어 달라고 했다. 미래의 대책도 없이 무엇 때문에 당당한지 그가 신임이 가지 않았다. 배짱 하나로 살아간다나 어쩐다나. 그렇게 우리는 만나 토끼와 거북이처럼 살아가고 있다.

오래 전 지난날을 회상한다. 연애시절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이 30분을 넘기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끝장 낼 참이었는데 또 늦다니……. 부아가 치밀었다. 일찍 와서 먼저 기다려도 시원찮은데 벌써 왔느냐며 미안하단다. 일방적으로 먼저 전화해서 만나 달라 사정해 놓고 번번이 늦게 와서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그 뒷말은 더욱 가관(可觀)이다. 가지고 온 돈이 없으니 차(茶) 값을 나보고 지불하란다. 생긴 얼굴이 두꺼워 어릴 때 별명이 두꺼비였다고 하는데 참 염치없는 사람이었다.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만났던 것이 평생 인연이 되어버린 우리 사이.

그 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막무가내로 만나달라고 졸라댔다. 그 당시 나는 대그룹 경리과에 근무했고 독신을 선호(選好)하는 사람이었다. 또한 남자에게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해 그 흔한 연애 한 번 하지 못 했다. 어떤 이는 결혼을 '인생의 무덤'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결혼 후 내가 꿈꾸는 작가의 길을 갈 수 있게 해준다는 달콤한 말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래저래 야멸차게 정을 떼지 못해 친정어머니가 전세금을 보태주어 겨우 신혼 방을 차렸다.

그런 기대를 했던 내가 바보였다는 생각이 든 것은 결혼 후 몇 달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사람의 느긋한 습관은 다시 이어졌으며 먹을 쌀이 없어도 걱정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서둔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면서 천하태평이었다. 어디 믿을만한 후원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벌어놓은 돈도 없었으며 그나마 총각 때 하던 사업의 실패로 남은 빚도 정리가 안 된 상태였다.

세끼 먹을 걱정까지 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해버린 내 신혼생활. 어처구니없는 현실 앞에서 한숨소리는 날이 갈수록 방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늘 같이 있고 싶어 결혼을 해도 살다보면 후회한다는데 콩깍지가 씌어 어쩔 수 없이 해버린 내 결혼. 깨가 쏟아진다는 신혼은 걱정거리만 늘어났고 결국 성질 급한 내가 가장처럼 팔을 걷어붙여야 했다.

무슨 일이든 돈이 되는 일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초등학생을 상대로 개인지도를 하고 시간 강사생활을 하다가 유치원 운영을 시작했다.

그러나 남편에게도 믿을만한 구석이 있긴 했다. 한 가지 일을 잡으면 끝까지 매달려 해내고 만다. 전자 제품 같은 것을 고쳐 달라고 맡기면 부품을 해체시켜 기어이 고쳐 낸다. 한번은 전파사에서도 못 고치는 것을 며칠이나 걸려 고쳐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기억도 있다. 그런 사위를 친정어머니는 대기만성(大器晩成)형이라고 하셨다.

나는 토끼다. 호기심이 많아 먼저 시작하고 앞만 보고 뛰다가 지치면 쉬는 습성이 있다. 감각과 순발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는데 그런 재주만 믿고 모든 일을 쉽게 밀어붙였다.

그런 일들이 남들과의 경쟁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의 삶이 느슨해질까 두려워서 였고 잡아 당겨야 팽팽해지는 고무줄처럼 무엇인가 몰두할 때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앞서 가던 토끼가 마구 뛰다가 실패를 거듭하는 동안 거북이는 주저앉지 않고 끊임없이 정상을 향하고 있었다. 내로라하는 대그룹 신문사 한 분야에서 최고의 인정을 받았고, 다들 어렵다는 시기에 당당히 승진할 수 있었다.

무기력하게 보이던 남편의 능력을 인정하던 어느 날, 나는 10년 동안 운영해 오던 교육사업의 꿈들을 접기로 했다. 가르치는 일 대신 기름때 묻은 작업복을 빨면서 소중한 월급을 알뜰하게 챙겼다. 남편에게 "당신 덕에 먹고 사니 정말 행복하다"는 말도 아끼지 않고 해주었다. 좁게만 보이던 남편의 등이 넓고 든든해 보이기 시작하더니 부부의 정(情)도 날로 두터워졌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고 했던가. 내 남편이 그랬다. 시댁과 친정 식구들을 돌보는 일에 앞장서는가 하면, 그동안 부족한 자기를 믿고 기다려준 장모님의 큰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인지 친정 식구들까지 살뜰하게 챙겼다.

그 동안 동작이 그렇게 굼뜬 것도 몸소 체험 속에서 자신을 키워가기 위함이었단 말인가. 시작할 때 빠르게 반짝이는 것보다 천천히 오래 걷는 것이 오히려 빠르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첫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한길을 묵묵히 걸어왔던 그 사람. 우리의 만남이 건성으로 스치는 인연이 되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올올이 가슴에 새겨 굵어진 그 뜻. 지금도 가끔 사소한 일에 분을 삭이지 못해 '파르르' 떠는 나를 볼 때마다 슬그머니 그 자리를 피해버리기도 하지만 손이 닿지 않는 등을 긁어주면서 잔잔하게 웃기도 한다.

이제 나는 헛된 꿈을 접고 문학이라는 차분한 둥지 안에서 참 뜻을 이루었고, 지금은 음성이란 곳에 귀촌해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늘 끝이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온 그 느슨한 남편의 어깨 위에 승리의 깃발을 꽂아 주고 싶다.

"내 남편 거북이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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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기업 돋보기 5.장부식 씨엔에이바이오텍㈜ 대표

[충북일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 국내 시장에 '콜라겐'이라는 이름 조차 생소하던 시절 장부식(60) 씨엔에이바이오텍㈜ 대표는 콜라겐에 푹 빠져버렸다. 장 대표가 처음 콜라겐을 접하게 된 건 첫 직장이었던 경기화학의 신사업 파견을 통해서였다. 국내에 생소한 사업분야였던 만큼 일본의 선진기업에 방문하게 된 장 대표는 콜라겐 제조과정을 보고 '푹 빠져버렸다'고 이야기한다. 화학공학을 전공한 그에게 해당 분야의 첨단 기술이자 생명공학이 접목된 콜라겐 기술은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분야였다. 회사에 기술 혁신을 위한 보고서를 일주일에 5건 이상 작성할 정도로 열정을 불태웠던 장 대표는 "당시 선진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일본 기업으로 선진 견학을 갔다. 정작 기술 유출을 우려해 공장 견학만 하루에 한 번 시켜주고 일본어로만 이야기하니 잘 알아듣기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공장 견학 때 눈으로 감각적인 치수로 재고 기억해 화장실에 앉아서 그 기억을 다시 복기했다"며 "나갈 때 짐 검사로 뺏길까봐 원문을 모두 쪼개서 가져왔다"고 회상했다. 어렵게 가져온 만큼 성과는 성공적이었다. 견학 다녀온 지 2~3개월만에 기존 한 달 생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