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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1.12.23 16:54:08
  • 최종수정2021.12.23 16:54:08

안남영

전 HCN충북방송 대표

카뮈의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백주에 총으로 사람을 죽이고는 까짓 변론을 구차하게 여긴다. 실존주의 대표작으로 대학 때 배운 이 소설의 주제가 아직도 아리송하다. '햇볕이 너무 강렬해서'라는 살인 동기의 설정은 참 알기 어려워 작품성에 의문이 들기도 했다.

사람이 가장 극적으로 자존감을 맛보는 순간은 누군가를 향해 총을 겨눌 때라고 한다. 목숨을 구걸하는 사람 앞에서겠지만 말이다. 이런 미국 심리학자의 분석도 읽은 적이 있다. 살인범 대상의 살인 동기 진술에서 '무시당했다(disrespected)'는 표현이 가장 많이 나왔다는 것.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분노조절장애 환자가 해마다 늘고 있으며, 살인 이유 중 충동조절 실패(40%)가 압도적이라고 한다.

살다 보면 마음의 불을 끌 수 없을 때가 있다. 화는 언제나 충동적이다. 주차, 층간소음, 가격 등 온갖 시비로 인한 충동 범죄가 가정에서건 도로에서건, 연인·친구 사이를 막론하고 허다하다. 이런 뉴스 때문에 습관적 분노, 짜증유발러, 분노 공화국 등은 이미 익숙해져 있다. 코로나 방역체계가 흔들리면서 그 분노 수치는 더욱 등등하다.

유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喜怒哀樂愛惡欲) 가운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유독 두드러진 것을 꼽자면 분노(怒)인 것 같다. 여기저기 툭툭 터지는 짜증과 분노가 언제 어디서든 우리 인내심을 시험한다. 온 사회에 '분노조절장애'라는 병증이 만연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소득이 안정될수록 시민의식과 민주주의가 꽃피게 마련이라는 건 대체로 상식에 속한다. 선진국에 진입한 우리의 의식 수준은 유튜브의 '국뽕채널' 활약이 아니더라도 대견한 점이 많다. 하지만 인심의 저변에는 강퍅과 찜부럭이 습성화돼가는 모습이 보인다. 까닭이 뭘까?

경거망동조차 주체적 삶처럼 존중해 줘서 그런가? 원인이야 많겠지만 르상티망(ressentiment)도 유력한 근거라고 본다. 원한, 시샘, 질투심, 복수심 등의 의미를 지닌 말인데 영어사전엔 '패배주의적인 토라진 태도'라는 설명도 나온다. 니체는 이를 강자에 대한 약자의 자연스러운 자기방어 기제로 처음 개념화했다. 이런 시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저항적 기치에 일리를 부여한 철학자도 있다.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 보았으니/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요절한 시인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이란 시가 르상티망의 언저리를 보여준다. 우리는 어쩌면 기질적으로 질투에 물들어 있는지 모른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고, 남의 떡이 커 보인다잖는가. '풍년거지'란 말도 있지만 요즘 부동산값 폭등으로 '벼락거지'가 이슈다. 갑질 뉴스가 자주 조명받는 것도 질투의 맥락으로 풀이된다.

또 제목에 '분노는 나의 힘'을 단 콘텐츠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세상을 바꾼 '역사적 분노'가 있긴 해도 분노의 일상화 덕에 그런 스토리가 먹힌다는 얘기다. 댓글창은 분노의 배기통이 된 지 오래고, '분노 소비'란 말도 등장했다. 암튼 분노는 코로나처럼 전염성이 강한 것 같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좋은 시절' 속의 우리 사회가 어쩌다 분노 공화국이 되었을까? 우선 샘이 많은 민족성과 소득양극화가 원인(遠因)으로 떠오르지만 후기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면서 수호할 이익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상처받기 쉬운 게 현대인의 삶이다. 여기에 어설픈 권리의식이 경쟁의식이나 빈약한 공감 능력과 결합하다 보니 잠자던 르상티망이 분노로 폭발하는 것이다. 치유가 사회복지의 항목으로 들어온 것도 캐보면 이와 닿아있다. 또 르상티망은 곧잘 집단 표출되기도 하는데, 집회 현장이나 '개발 결사반대' 현수막 등의 이면에서 르상티망 코드가 발견된다.

르상티망 자체를 문제시할 순 없다. 감정조절에 과부하가 걸리기 쉬운 현대인들이기에 잘못 분출하는 게 문제다. 틀어막을 수 없다면 그 수위, 방법이라도 사회적 관리가 필요하다. 대통령이 앞장서면 좋을 텐데, "어떤 분노는 괜찮다"는 식의 과거 발언이 맘에 걸린다.

하버드대 정신과 의사는 "화는 참거나 발산하는 게 아니라 해체하는 것(defusing)"이라고 했고, 틱낫한 스님은 "화도 신체의 일부이므로 싸우지 말고 인정하라"고 조언했다.

유난히 화가 많이 쌓인 신축년이다. 새해는 모두 분노 해체 기술 하나쯤 개발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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